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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Aug 07. 2023

지향

징한 몸살이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2악장, 라르고.  베토벤의 단 하나뿐인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한다.

 

이 2악장은 불현듯 밀려오는 삶의 울림 같다. 강도만 다를 뿐 반복해서 밀려오는. 그중에 노래하는 시. 그것이  저 바이올린 소리 같다.





날이 흐리다.

흐린 줄만 알았는데 비가 왔다. 흐린 날 거실은 내려앉아 있다. 흐린 날이 내미는 조도는 다른 빛의 도움 없이 그대로의 질감을 받아들이고 싶게 한다. 그 질감을 바라본다. 정리 안 된 집은 '헤벌레'이구나. 좀 나아지면 치워야지. 힘이 없다. 단백질 보충. 연어를 굽는다. 태순이 것도 조금, 새끼손가락만큼 떼어 준다. 쑨이 살이 빠졌다. 너도 먹고 싶지? 일하러 나가고부턴 내가 잘 못 챙겨서 매번 먹는 사료만 주니..


오늘은 나만 바쁘던 평소의 아침 시간이 길게 늘여진다. 거실 창밖도, 태순이 마음도 하나하나 짚어진다. 바쁠 수 있는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무력은 시간을 길게 늘일 뿐만 아니라 시선 가는 곳 마다마다에 오래 머물게 한다.



기다려.  . . .  먹어.



힘겹다. 복직하고 피곤한 하루하루가 계속되더니 슬그머니 그 틈을 비집고 몸살이 너울거린다. 직장 가서 만날 일들은 그립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만 내게 에너지도 준다.  


준비하고 나선다, 우산을 받고.

바람이 거칠다. 운전할 때는 나와 상관이 없었다, 비바람을 뚫고 가는 번거로움이. 이젠 걸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니 이런 날씨를 대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안 참 편하게 살았구나. 태풍이 온 것도 아닌데 이쯤이야. 그런데  몸살이 비집고 든 나는 영혼이 갈피가 없어져서 이 바람에 날릴 것만 같다. 정신줄을 잡는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클래식 듣고 잠 오는 사람이 더 많다던  남편 말. 나도 긴 출근 시간 자 보려고 듣는다. 까칠한 눈을 감아 본다. 그런데  잠은커녕 정신이 더 또록 또로록. 특히 2악장은 불현듯 몰려오는 삶의 울림 같다. 강도만 다를 뿐 반복해서 몰려오는. 그중에 노래하는 시. 그것이 저 바이올린 소리 같다. 시가 부르는 노래는 섬세해서 잠이 다 달아날 수밖에.


관현악 부가 배경에서부터 전경으로 몰려올 때 예의 그 파도와 같은 휩쓸림은 늘 경외다. 풍부한 유동. 영화 '동사서독'의 파도, 부감으로 찍혔던 파도가 떠오른다.

"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물론 나는 이 대사를 변용했던 스무 살 무렵 한 청년의 10년 뒤 다음 글귀가 더 맘에 든다.

'아름다운 시절을 나는 너와 함께 보내지 못했다.'


'빠삐용'의 파도도 밀려온다. 7번째 물결. 그것이 감옥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는 조류다. 그 순서에 몸을 던져야만이 '탈옥'이다.


ⓒ ㈜에이앤비 픽쳐스, 빠삐용의 탈옥



삶의 유동은 그지없다.

나는 그 어느 한 물결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갔다 하고 있겠지. 때론 그 순간을 놓치고  빠삐용처럼 내게 알맞은 조류를 기다리기도 한다. 동사 장국영과 서독 양가휘가 오가는 동안 장만옥의 아름다운 시절은 간 것처럼, 남겨진 시간의 나이테를 마른 손가락으로 더듬기도 하지. 그러는 사이 변함없이 삶의 울림은 밀려오고 밀려가니 그 속에 시절은 또한 아름답게 탄생한다. 그래서 저 음악의 끝 3악장은 경쾌한 환호성인 것인지.


베토벤의 바다에서 영혼을 쉬인다. 잠은 실패다.

그러고 나니 강.



비는 모든 것을 모노 톤으로 만든다. 과거 같은 현재의 창. 30년 전과 지금, 이 강 건너 출근하는 나와 또 나.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유동의 물결이 있었나. 잘 왔다, 여기까지.






어제 퇴근하면서 어떤 '지향'을 보았다. 두 팔, 온몸. 모두 어딘가를 향한다.


흔한 몸살, 참을 만은 하니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가고 있어도 경중을 달리하며 몰아치고, 또 오래이다. 이럴라치면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던 그 노래가 입술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저렇게 꼿꼿이 서 있는 지향. 물끄러미 보다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긴다. 빨리 가서 누워야지. 그런데 또 하나의 '지향'이 집에서 날 기다리네.



이사 와 보니 침대 머리 위 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벽걸이 에어컨 흔적이겠지. 그 자리에 저 캔버스 그림을 걸어 두었다. 그림이 새삼스럽다. 봄, '분홍의 지향'이 보이지 않는가. 고흐도 영락없이 느꼈을 것 같다. 야들야들하지만 무심히도 강한 저 지향. 그런데 나의 그것은 베개맡에 구겨 두어야 하는구나. 이런 몸으로는.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출근인데. 기어이 읽고 만 '존 버거'를 다시 찾는다. 그에 대한 소개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운운이 아닌,


'노동과 글, 농부와 작가, 은둔과 참여를 아우르는.'


간혹 삽입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묘사는 그의 사유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라일락'에 대한 것도 그렇다.


여기 산골 지방에서는 뻐꾸기가 처음 우는 때에 맞춰 라일락이 꽃을 피운다. 뻐꾸기와 라일락이 한 쌍으로 피고 우는 것이다.  ㆍㆍㆍ라일락의 향기가 젖소를 키우는 외양간의 냄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당신은 말했었다. 둘 모두 평화와 느림의 냄새다. ㆍㆍㆍ
창 곁에 면도용 거울이 하나 달려 있다. 거울에 비친 라일락 가지 하나를 올려다본다.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p. 69~70


꽃이 피는 때를 소리로 만나게 한다. '평화와 느림'을 일상의 노동이라 할 냄새에서 찾고 그것을 꽃향기와 나란히 놓았다. 사랑이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니.  라일락 가지 자리, 혹은 사랑의 자리는 그냥 자리가 아니리라. 책의 2부, '공간에 대한 사유'에서 그가 말하고 싶어 한 '소외되지 않는 공간' 아닐까.


제 밤에 자기는 글렀다. 일전에 아파트에 피어난 라일락 사진을 찾아보려 뒤적인다. 여전히 몸은 어찌하기 곤란한 미세한 통각이다.


라일락.  올봄 산책하며 보았다. 아파트 정원에서.


아침에 일어나니 천근만근. 날이 흐리다.






몸은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내 몸을 구석구석 훑고 있는 몸살이란 너는 미래, 그러니까 존 버거 식으로 말하면 희망. 으로 향해가는 도중임을. 또한 하나의 자그마한 유동임을. 발견하고 다시 베개맡에서 꺼내어 두 손, 두 팔 들어 공손히 받들 준비를 해 본다.


내 삶의 지향.










ㅡ 복직하고 두 달여 봄에 너무 오래 몸살했다. 그래도 결근하지 않았다. 그럴 만큼까지는 아니어서이기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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