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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Nov 29. 2023

민화, 정다운 그림이군요 1

민화 첫 수업_연화도와 니체

   뻔한데 모른다. 민화가 그랬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가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의 '여우난 곬족' 중에서



민속의 풍경이란 기억에 끈끈히 남아 있다. 배고프게 자라는 에서 명절 그 하루, 무이징게국의 내음새가 몽글몽글 오르면 고 작은 콧구멍이 발랑발랑, 늦은 이부자리에서 반잠은 깨어 흥건할 아이의 기쁨이 중년은 뼛속으로 느껴진다. 우리 지방에는 명절이나 제삿날, '탕국'이라 부르는 무가 든 고깃국이 있다. 시어머니제사를 정리하고 돌아가시니 그 국 먹을 일은 이제 다. 저 '무이징게국'을 읊을 때마다 시원하고 덜큰할 맛이 상상되어 마치  모금 삼키기라도 한 듯 싸르르 입안에서 감도는 국물을 느낀다. 그러면  아이 행복감이 묘하게도 구석구석 전해지는 것이다. 아이 때는 여자들의 고된 노동일랑 알 턱이 없으니 그날 하루 부른 배가 마냥 좋지. 민속이란 지방이 달라도 이렇게 공유하는 기억이다.


민화 역시 민속의 그림이니 이렇듯 익숙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서라, 막상 아는 것이라곤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제삿날 둘러치던 병풍 화조도나 집집마다 한 둘 장식이라고 걸려 있던 낡은 액자 속 야한 그림,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모란이었을 듯싶은 커다란 붉은 꽃과  혹은 연꽃 사이로 노니는 원앙과 잉어 등이 낯익은 정도일까. 겨울을 데워주던 솜이불에 놓인 자수라든지 어른들 따라 간 절간에서 만나던 원색 그림도 민화의 맛 아닌가 싶다만. 덧붙여 어떤 기복을 담고 있다는 모호한 지식 정도. 이것이 내가 아는 민화의 전부 아닐지.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는 서양 미술 위주로 배웠다.




민화 수업을 시작하고 식물잎을 그린다. 연필로 본을 뜨고 색칠해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처음 붓을 잡아 보니 이건 뭐 어쩔갑쇼인데 손이 떨리지 않게 한 번에 슉 그리는 게 낫다는 걸 알겠다. 옅은 색으로 밑칠을 하고 마르면 조금 더 어두운 색을 입혀 '바림질'을 한다. 바림질이란 색의 진하기와 연하기를 통해 강약과 깊이감을 나타내는 기법인데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물붓으로 그라데이션해 주는 게 중요하다. 대번에 식물잎이 입체감으로 그윽해진다. 잎맥을 그리는 검은색 '선치기' 역시 시작점에서 끝점을 겨누어 한 번에 내리긋는 것이 좋다. 너무 길어 어려우면 중간에 끊은 후 리듬감이 깨지지 않게 연결한다. 초보인데 이 만큼이 어디냐 싶으니 쓱쓱 재밌게 해 본다. 잘하려고 애쓰면 색이 오히려 너저분하고 선은 더 구불텅해지는 걸.


날, 이렇게 '바림질' '선치기'를 배웠다. 김도희 선생님은 코스모스 같다. 그의 민화도 수채화처럼 부드럽다.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민화를 하신다. 느낌이 좋다.


처음 민화 연습




두 번째 시간 연화도, 가을 연꽃이다.

본을 한지 밑에 깔고 전사하므로 형태 걱정할 것이 없다만 색상을 맞추 장난 아니. 오랜 시간 한국 물감을 익혀야 색에 자유자재가 되겠지. 선생님이 색상을 조절해 주시니 웬만해선 느낌이 안 날 순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그리고 칠한다. 무념무상이 이런 것이로구나.


두 번째 그린 연화도


생생하지 못한 품이 꼭 나 같다. 내 그림은 남들보다 연하고 힘이 없다. 망칠까 봐 소심해서이리라. 프리다 칼로처럼 강한 그림을 나는 절대 못 그릴 거야. 선병질적기까지 한 에곤 실레의 날카로움도 멋지 흉내도 못 낼 것이다.


그동안 넣어두었던 약을 또 꺼내 먹기 시작했다. 진통제가 퍼지면 민감하던 신경이 무디어지고 모세혈관 마구 풀리는 듯 나른하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 그러면 안심하고 잠을 좀 잘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고만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간의 노력이 혼자 깨춤을 춘 것처럼 머쓱해진다.


질병으로 극도의 고통을 받았던 니체 아플 때는 염세적이지 않도록 오만함을 스스로 처방하면서 건강한 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건강할 때는 오만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만 가능한 통찰을 얻어라고 하였다. 그의 병력은 '위대한 건강'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고통으로부터 실존의 지혜를 얻는 방법이 그답게 재미있다.


그간, 병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만'을 한 번 길러 볼까. 퍼스널 컬러 색채 진단을 할 때 나는 여름 쿨톤이었다. 에너지가 적은 여름형 인간이다. 한 여름 무더위 속에 사물은 지치다 못해 고요하다. 여름형은 고요하다. 화려하기보다 단아하고 우아하다. 보석으로 치면 진주라고 하였다. 내 에너지만큼 살면 된다. 과하면 바스러진다. 연꽃이 희미하면 어떠랴. 대신 고요하고 단아하지 않은가. 


아프고서야 뒤늦게 꽃을 찾게 된 어느 날, 꽃의 심장이 뛰어서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그것도 작위적이라 싫어하던 티피어리를 만들가. 

 '언어의 꽃을 시라고 한다면 자연의 시가 꽃이구나.'

그때서야 꽃을 알게 되었다. 병이 오면 병이 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연화도가 마음에 든다.









민화의 연화도는 불교적 관념보다는 생명 창조나 자손 번창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연(蓮)’은 ‘연(連)’ 과 같은 소리인데 새가 쪼는 연밥은 씨앗이니 자손이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도 한다. 아끼는 도록에서 부분을 가져와 본다.

본태 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도록(2022. 9) p. 59. '연화도 8폭 병풍' 도판을 부분 촬영하였다.  







휴직 마지막 해, 그러니까 작년 여름. 동네 평생 학습관에서 그림을 잠시 배웠다. 그때 민화 수업 기록을 4회로 나누어 올려 볼까 한다.





*그림 내게 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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