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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Dec 12. 2023

바닥짐(Ballast)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는


단톡방이 연신 울린다. 

온종일 좋은 글, 유익한 정보가 계속 올라온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것을 계속 올리는 사람도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딱 맞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좋은 글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대충 휙휙 넘기다가 오랜만에 보는 ‘바닥짐’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했다.      


바닥짐(Ballast)이란 선박 용어로 적당한 복원성을 유지하고 흘수와 트림을 조절하기 위해 배의 하부에 싣는 중량물을 일컫는 말이다. 배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 바닥에 채워 넣는 물이나 돌, 물건을 말하는 것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짐 때문이다. 우리 삶에도 무겁게 느껴지는 바닥짐이 있어야만 고난이 와도 극복할 수 있고 잘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평생 아프리카인들의 삶과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살아온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 말이다. 그는 우리 삶의 기저에 깔린 근심, 고통을 바닥짐으로 비유했다.      


리빙스턴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는데, 집을 나가버린 방탕한 아들 때문이었다. 그런 아들을 생각하면 남들 앞에서 더욱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어려움을 당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외면할 수가 없었다.     




바닥짐을 설명하는 다른 예화도 있다.      


눈보라가 치던 추운 겨울날, 맨발의 인도 전도자 선다 싱이 히말라야 산길을 걷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가다 보니 눈 위에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대로 두고 가면 분명히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선다 싱은 동행인에게 같이 업고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지만, 이 사람을 데리고 가면 우리도 살아남기 힘들어요’라고 대꾸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선다 싱 혼자 노인을 업고 갔다. 얼마쯤 가다가 길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기 혼자 먼저 떠난 동행인이었다. 


선다 싱은 노인을 업고 죽을힘을 다해 눈보라 속을 걷느라 등에 땀이 났고, 두 사람의 체온을 더한 덕분에 매서운 히말라야 추위도 견뎌낼 수가 있었다. 그 결과 둘은 무사히 살아남았고, 혼자만 살겠다고 떠난 사람은 얼어 죽고 만 것이다.     


훗날 어떤 사람이 선다 싱에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 없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짐이 가벼워지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그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전쟁 같은 맛』의 주인공은 저자 ‘그레이스 M 조’의 어머니, 군자 씨다. 부산의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국 백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혼혈아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한국에서 외국인과 살을 섞어 낳은 아이들은 ‘양공주 자식’ ‘튀기’ ‘아이노코’ 등으로 불리며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낯선 외모만으로도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던 것이 1960 ~ 70년대 한국 사회의 민낯이었다. 


군자 씨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미국에서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며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고 애썼다.  

    

머리가 좋고 활달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가족을 잃었고 참혹하게 가난했던 탓에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기 자식만큼은 공부를 많이 하여 원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모든 여정을 다 마친 지금, 그녀는 유명한 교수님인 그레이스 조의 어머니가 되었다.     




엄마가 한국에서 매춘부였다는 사실은 그레이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섯 살 위의 오빠와 아버지는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엄마의 과거사를, 한 살 때 미국으로 온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천진하게 자랐다. 


생활력이 강하고 억척스럽던 군자 씨가 미쳐버릴 만큼 큰 상처였던 그 비밀을 그레이스는 올케에게서 전해 들었다. 엄마가 양공주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물려받은 그 트라우마를 자신의 삶과 학문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지적 호기심이나 사회학에 대한 헌신이 아닌, 알아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한 번도 제대로 밝혀진 적 없이, 대를 이어 전해진 한(恨)의 정체를 알아야만 배배 꼬인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전쟁 같은 맛』을 통해 사랑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던 생존자이자 디아스포라인 군자 씨의 존재를 당당하게 세상에 알렸다. 엄마의 성 노동자 이력은 그녀를 단단하게 이끈 바닥짐이 되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시대 상황과 아픔을 직시하고, 학문적 연구를 통해 엄마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 편견과 통념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


우리나라가 지닌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한 역사의 희생양이기도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치욕적인 단어들의 의미를 바꿔놓고 싶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양공주란 어휘가 더는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길 바랐다. 본인에게는 영웅인 엄마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계속 글쓰기를 통해 인식을 바꿔나가겠노라 천명했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바닥짐을 외면하거나 내던지지 않았기에 균형을 잘 잡고 나아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들에 발목이 잡히곤 한다. 하지만 삶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근심거리가 어쩌면 자기 삶을 지탱하는 바닥짐이 될 수도 있다.      


바닥짐은 자기 안에 배려와 겸손을 채워 삶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는, 끝까지 추구하고 싶은 고귀한 삶의 가치를 이루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들고 괴롭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바닥짐을 외면하거나 내다 버리면 안 된다. 모든 게 다 뒤집힐 만큼 막다른 순간에 부닥쳤을 때도 침몰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지혜의 눈이 되기 때문이다. 


      (시와 함께, 2023 겨울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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