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 이야기, 케렌시아
짧지만 밀도 있는 휴식을 취하고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
누에보 다리 근처에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다. 잠시 이야기하며 걸어가다 보니 문이 닫힌 투우장 앞이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텅 빈 거리엔 우리 일행뿐이다. 지금도 가끔 투우 경기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늘 저녁에 모로코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지브롤터를 먼저 둘러보기로 일정을 바꿨다. 오전에 잠시 점만 찍고 론다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버스 타고 이동하는 내내 가이드가 투우 경기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인간과 소의 싸움은 역사가 꽤 길다. 초기에는 주로 기사들이 부하들 앞에서 자기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말을 타고 소와 싸웠다.
어느 날, 소와 싸우던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관중석에서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와 달려드는 소에게서 사람을 무사히 구해냈다.
그때부터 투우 경기는 지금처럼 사람이 땅에 서서 빨간 천으로 소를 유인해 싸우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던 그 남자는 투우사의 시조가 되었다.
사실, 소는 색맹이라 빨간색은 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관객들을 더 격렬하게 흥분시키는 색깔일 뿐이다.
투우 경기에 나오는 싸움소는 일반 소와는 전혀 다른, 소의 귀족으로 불리는 품종이다. 평생 일을 시키지 않았고, 스트레스받지 않게 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놔먹였다. 싸움소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공격적인 놈을 골라 연습 한 번 시키지 않고 투우장으로 내보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위험해지기 때문인데, 소에게는 참 불공평한 처사였다.
어쩌다 투우 경기에서 용케 살아남은 소는 박제해서 영구 보존했다. 싸움에서 이긴 소에게 영웅 대접을 해준 것이다.
소의 급소는 목 뒤에 있는 견갑골이다. 평소엔 굳게 닫혀 있다가 먹이를 먹거나 뿔로 받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활짝 열린다. 급소가 열리면 소의 등에 말랑한 공간이 생긴다. 그럴 때 정확히 찔러야 칼이 소가죽을 뚫고 들어간다.
칼 여러 개를 등에 꽂은 소가 지치게 되면 심판은 흰 수건을 던져 잠시 휴식 시간을 주었다. 마지막 공격은 단방에 소의 심장까지 깊이 관통하는 게 최고였다. 소가 피를 쏟으면서 쓰러지면 관중들은 미칠 듯이 흥분하며 환호했다.
투우사는 요즘의 아이돌 가수 이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관중을 쥐락펴락했다. 경기장에 들어와 모자를 벗어 어느 여성에게 던지면 데이트하자는 뜻이고, 땅에 던지는 것은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작은 몸짓에도 관중들은 큰소리로 열광했다. 일류 투우사들은 돈도 많이 벌었다.
투우장에서 죽은 소는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투우 고기는 일반 쇠고기보다 훨씬 비싸게 팔렸다. 투우의 머리는 박제하여 벽에 거는 장식품을 만들었고, 성기는 정력에 좋다는 속설 덕분에 스페인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이 되었다.
나는 투우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케렌시아(Querencia)라는 스페인어 어휘가 떠오른다. 이 단어는 원래 피난처, 안식처라는 의미인데 마지막 결전을 앞둔 싸움소가 잠시 쉬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투우 경기장에는 소의 눈에만 보이는 안전 구역이 따로 있다. 예리한 칼 여러 개가 목덜미에 꽂히게 되면, 지칠 대로 지친 소는 최후의 공격을 하기 전에 자신이 정해 놓은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다시 모은다. 소의 눈에만 보이는 그 피난처가 바로 케렌시아다.
사람에게도 힘들고 지쳤을 때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케렌시아가 따로 있다. 평소엔 잊고 있던 자신의 본질과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나는 누에보 다리 옆 노천카페에서 숨을 고르며 빡빡한 여정을 계속할 힘을 다시 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