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테포냐, 미하스, 당나귀 택시,
탕헤르에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다시 건너오니,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며칠 동안 헤어졌던 빨간색 전세버스를 선착장에서 다시 만나니 팔짝 뛰게 반갑다. 별로 말이 없는 스페인 운전기사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인천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영 서먹서먹하던 작가들도 모로코를 다녀오는 사이에 부쩍 가까워졌다.
우리는 무사히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스테포나의 호텔에다 여장을 풀었다.
원래 일정대로면 이 호텔에서도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서 지브롤터로 가야 한다. 하지만 모로코로 가는 날의 동선에 맞춰 지브롤터를 미리 본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여유시간이 생겼다. 11시에 출발해도 된다는 말에 다들 모처럼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호텔 주변을 거닐며 사진도 찍으면서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이사벨 여왕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아가며 콜럼버스를 후원하게 된 숨겨진 이유는 없을까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두 사람 간의 은밀한 감정적 교감 같은 것 말입니다.”
삼삼오오 자연스럽게 정원에 모여 앉아서 담소하는 중이었다. 지은경 시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화두를 툭 던졌다. 그러자 다들 상상력과 감수성을 발휘하여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을 주인공으로 즉석에서 연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모로코에서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보게 된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 지식에다 스페인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야사(野史)를 가미하여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흔 살의 이사벨과 서른아홉 살 콜럼버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여행 중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행복하고 재미있었다.
우리가 묵은 에스테포나는 스페인 남부 해안지대로 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말라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타리파, 동쪽으로 코트릴까지 약 300km나 되는 해안으로 세계적인 휴양지다.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날씨와 풍경과 인프라를 고루 갖추었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고, 일 년에 325일 이상 햇볕이 쨍쨍한 날씨라 일조량이 풍부하다. 그러다 보니 과일과 채소와 육류, 해산물 등이 풍부하고 물가도 싸다.
아름답고 쾌적한 숙소와 골프장, 술집, 식당, 요트장 등이 있고, 풍부한 햇볕과 맑은 공기와 온화한 날씨까지 받쳐주니 사계절 언제든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 딱 좋은 곳이다.
날씨가 춥고 햇볕 구경하기 힘든 곳이나, 물가가 비싼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휴가를 보내기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북유럽 사람들이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후에 태양의 해변에 와서 많이들 사는 모양이다.
요즘은 휴가를 유명한 관광지로 가는 것보다 날씨 좋고 경치 좋은 조용한 소도시에서 휴식과 충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추세다.
나도 더 늙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곳으로 휴가 와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두루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에 와 보니 음식도 괜찮고 물가도 싸서 마음에 들었다. 한가롭게 지중해를 바라보며 글을 쓰고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 내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고, 나중에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겠다.
버스는 언덕 위에 하얀 집들이 예쁜 도시, 미하스를 향해 달렸다.
미하스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소도시다. 모든 건물의 외벽은 하얀색으로 통일했고 지붕은 빨간색이어서 더 깔끔하고 아름답다.
골목마다 하얀 벽에 화분을 걸어 장식한 것이 보기 좋았고, 날씨도 화창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쾌적해서 더 좋았다.
미하스에는 당나귀가 많다. 살아 움직이는 당나귀는 물론 올라타고 사진 찍을 수 있는 당나귀 동상도 있다.
음식점 앞에는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놓은 당나귀도 있다.
당나귀 택시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당나귀 택시를 타고 하얀 집 사이로 난 골목길을 천천히 돌았다. 수레 여러 대를 같이 묶어서 함께 움직이니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골목길을 당나귀를 타고 구경하니 눈이 즐겁고 마음은 편안했다.
오늘 일정은 그라나다까지 가서 짐 풀고 잠만 자면 된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가게에 들어가 모자, 목도리, 티셔츠 등 비싸지 않은 귀국 선물을 사기도 하고, 색이 고운 가방을 좋은 가격에 건지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구경하는 시간이 참 좋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은 특별 보너스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천카페에 쳐 놓은 차일 밑으로 모여들었다. 향도 좋은 유기농 커피를 시켜 놓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여유롭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세계 속의 한국 문학으로 발돋움하려면 무엇보다도 번역이 관건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한글로 된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도 난상토론을 벌였다. 리스본 심포지엄에서 하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충분히 나누지 못했던 주제였다.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며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번 여행을 값지게 만들었다.
커피 맛도 유난히 구수하고 좋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