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 / 센강 / 뛸르히 가든 / 몽마르트르 언덕
딸이 이렇게 빨리 잠드는 건 술 마셨을 때뿐인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나보다 먼저 잘까. 다행이다 푹 자서. 나도 곧바로 잠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베란다 풍경은 낮에도 예쁘더니 새벽에도 예쁘네. 나의 시차를 걱정하는데 3교대로 단련된 몸이라 괜찮을 듯. 2주 여행에 시차가 등장하면 곤란하다.
딸은 내 화장을 해주더니 옷을 이거 입어봐라 저거 입어봐라 했다. 딸의 옷차림은 한국이라면 사람들 시선을 조금 끌만하게 입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도 옆구리 살이 약간 비어저 나오는 차림새에 엉덩이가 도드라져 보이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잔소리하려다 십계명 때문에 참았다. 캐나다에 살다 보니 그런 걸 신경 안 쓰게 됐단다.
우리나라가 좀 심하긴 하지. 나에게 관심도 없는 스쳐가는 사람들 의식하고 눈치 보며 사니. 그런 점에선 자유로워진 딸이 좋아 보였다. 파리엔 창가에 꽃이 참 많고 난 그게 또 너무 예쁘다.
북적이는 곳은 안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는다며 에펠탑에 가자고 했다. 아침으로 빵을 사서 먹으며 갔다.
차에서 내려 걷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뭔가 보고 있었다. 혹시 드디어 드디어 보이나. 에펠탑이었다. 탑이 이런 색이었나. 멀리 작게 풍경으로만 봐서인지 가까이서 보니 엄청 컸다.
미술관은 우선입장권이라 줄 서지 않고 11시에 바로 입장한다고 했는데 에펠탑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는지 11시까지 가긴 빠듯했다. 걸어갈 건데 힘들 것 같다며 아쉽지만 우선입장을 포기하고 센강 산책을 했다. 배 위에
빼곡한 사람들을 보니 친구 지연이가 그리면 예쁠 것 같았다. 좁은 강에 배가 다니는 게 신기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긴 줄을 보며 혹시 되나 물어보니 우선입장자격이 아직 살아있었다. 두근두근. 바로 들어갔다. 그림들이 앞에 있는데도 이게 실화인지 믿기지 않았다. 꿈인가.
밀레 모네 시슬리 마네 세잔 고갱 그리고 고흐그림이 보이자 흥분해서 딸에게 말했다. "어떡해 고흐야!"
방금 붓칠 한 듯 선명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한 층을 보는 데 한 시간이 넘어갔고 잘 모르는 건 넘어갔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리 아픈 것도 괜찮았도 배도 안 고팠다. 숙제를 하는지 (아마도) 파리의 어린 학생들이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는 걸 보니 부러웠다.
점심으론 파스타를 먹었다. 딸은 계속 내가 맛이 있어하나 살폈다.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지만 적당히 맛이 있다고 했다. 들켰을까. 오늘도 십계명을 실천하고 있다. 내가 남긴 걸 가져와서 딸은 저녁으로 먹었다.
튈르리정원에는 뒤로 젖혀지는 의자가 있었다. 누워보니 정말 발의 피곤이 풀리는 듯 시원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우리나라에도 도입했으면 좋겠다. 혹시 벌써 있나. 무성한 나무들과 물 위에서 노는 오리 가족. 분수를 향해 앉아 있는 사람들. 다 좋아 보였다.
딸이 가져온 오일파스텔과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싸게 산 오일 파스텔은 색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불량이었다. 다른 건 선물 받은 거라 잘 나왔다. 몇 색 되지는 않았지만 되는 대로. 역시 누구 그림인지 딱 보면 알겠다. 숙소에 와서 내가 가져온 걸로 덧칠을 하자고 했지만 우린 곯아떨어졌다.
몽마르뜨언덕에 가려고 전철을 탔다. 막 역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아"
딸이 급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왜! 엄마 왜?"
"새똥"
살면서 머리에 정통으로 새똥을 맞은 건 처음이다. 놀란 딸에게 괜히 미안했다. 다 준비해 왔지 하며 딸은 물티슈와 휴지를 꺼내 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꼼꼼히 닦아줬다.
언덕에 오르기 전 어제 챗GPT에게서 알게 된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세계각국 언어가 쓰여있는 곳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찾았고 아래 '사랑해'가 쓰여 있는 곳에서 둘이 인증숏을 찍었다.
어이구 내가 싫어하는 계단이 많기도 하네. 힘내서 올라가니 또 계단.
"갈 수 있겠어?"
"그럼."
딸이 앞서 올라가다 중간중간 멈춰서 같이 쉬어가며 다 올라갔다.
개성 있는 카페가 많았고 과일 가게에 놓인 과일들마저 알록달록 예뻤다.
"별거 없지?"
딸이 말했지만 괜찮았다.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런대로 좋았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서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고흐도 이곳에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며 새우가 들어간 샐러드와 딸기를 사 왔다. 딸기는 모양이 조금 달랐지만 맛은 비슷했다. 딸이 컵라면을 먹으라고 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낀다며. 스위스 가서 먹자며?"
"그냥 먹어. 엄마 먹을 거 모자라잖아."
냉장고가 없어서 뜯으면 다 먹어야 하지만 김치도 먹었다. 라면엔 김치지.
신김치 냄새를 맡는 데 행복했다. 컵라면 냄새도 마찬가지였고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와 진짜 맛있다."
난 라면을 즐겨 먹지는 않지만 내 생애 가장 맛있는 라면이 될 것 같다.
누우니 피곤이 몰려와서 사진을 정리하며 졸았다. 딸이 웃으며 오늘은 엄마가 먼저네 하며 자라고 했다. 이 정도면 시차적응 완벽하다. 자고 일어나니 딸은 자고 있고 난 지금 한국시간 5월 15일 오후 1시, 파리 시간 새벽 6시에 어제 이야기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