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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Dec 17. 2022

선박



   쌀쌀한 바닷바람에 절로 어깨가 으쓱였다.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큰 배가 고동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있었다. 자, 슬슬 준비합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깨와 목을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남자가 내게 손을 건넸다. 형씨, 처음이랬지? 하다 도망가면 안 돼. 다정한 목소리에 반대되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신음을 내며 일어났다. 희미했던 배가 선명하게 보이자 화물차 한 대가 부둣가로 다가왔다. 모두가 차를 따라 부둣가로 향하는데 단 한 사람만이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난 남자는 저러다 알아서 올 거니 내버려 두어, 하고 내 팔뚝을 잡아 이끌었다. 배에 오르자 눈을 어디에 두던 모두 내가 옮겨야 할 짐들이었다.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내의 수술비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막상 힘들어 보여도 원양어선 같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남자가 허리춤에 팔을 지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두꺼운 팔뚝에 핏줄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아닌 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무 박스로 포장된 짐들은 내 상상한 것보다 무거웠다. 나는 박스를 하나만 들어도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반면, 남자는 두 박스 정도는 가뿐히 들어 올려 화물차까지 속보로 걸었다. 다섯 개 남짓 옮겼는데 벌써 옷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그런데 문득,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괜히 짜증이 나 그를 힐긋 째려보았다. 무슨 일 있나, 오늘은 계속 저러고 앉아있네. 어이, 페트로! 내 뒤에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제서 나는 페트로라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까맣게 탄 얼굴, 한껏 들어간 볼. 박스 하나도 들기 벅차 보였다. 미, 미안 캅니다. 짜르찌 말아 주세요. 남자는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배를 향해 힘없이 걷는 페트로의 왜소한 어깨는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몸으로 무거운 짐도 들기 힘들 텐데, 그럼 일찍이부터 일을 도와야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배로 향하는데 순식간에 페트로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는 남자와 같이 박스 두 개를 지고 빠른 속도로 화물차로 향했다. 언제 저렇게 빨리 간 거지?

 어느덧 바다 위로 해가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 선박 안에 짐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신 귓가에 맴도는 파도소리에 혓바닥을 내밀었다. 바닷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침 먹고 합시다! 그 소리에 모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따라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몇 번 눈치를 살피다 남자의 앉아도 된다는 손짓에 곧장 엉덩이를 붙였다. 이대로 등을 붙이면 잠에 들 것 같았다. 부둣가 시장 쪽에서 아주머니들이 머리에 철판을 이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식사 왔어요, 말을 듣자마자 세 명씩 모여 둘러앉았다. 나는 남자와 페트로와 함께 앉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말을 할 힘도 없어 삼키기로 했다. 우리 앞에 새하얀 천이 덮인 철판이 놓였다. 천을 드러내자 생선 살이 들어간 뽀얀 죽에서 김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절로 나오는 군침에 입맛을 다셨다. 우리 페트로가 좋아하는 거 나왔네. 많이 먹어. 남자가 페트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깜보디아에서 많이 먹었어요. 생각나요. 엄마. 그는 그릇을 덥석 잡더니 허겁지겁 죽을 먹어치웠다. 남자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더니 이내 담배 두 개비를 쥐어주었다. 좀 늦어도 되니까 하나는 식후경으로, 하나는 생각 정리하면서 피워. 페트로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담배를 받아 부둣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앉았던 자리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젊지만 다크서클이 축 처진 여자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내버려두어, 저 칠칠이한테 그것만 한 보물 없어. 남자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순 간 돋아버린 소름에 서둘러 사진을 내려놓았다.

 다시 일을 시작하자는 신호가 울렸다. 페트로는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잔뜩 쌓인 물류를 보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늦게 온 주제에 무슨 한숨이지? 일하러 외국에 왔으면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나는 들고 있던 상자를 그에게 넘겼다. 할 거 없음 이것 좀 옮겨줘요. 페트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등을 돌려 화물차로 향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상자를 내려놓자 모두 환호를 질렀다. 나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수고했다고 고개를 숙이는데 페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부둣가 뒤편, 까만 피부의 남자가 보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귀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었다. 통화내용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가 코에 검지를 대고 서있었다. 그리고 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캄보디아에 있는 아내가 많이 아프대. 병원비는 둘째치고 아픈 아내 곁에 있어주지 못해 며칠 째 저러는 중이야. 그러니 자네가 좀 이해해줘. 문득, 내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당을 받고 기차역 앞, 나는 곧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여보, 지금 바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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