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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Dec 22. 2022

오늘


  차가운 바람은 내 귀를 따갑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바람을 막으려 후드를 뒤집어썼다. 수레 안에는 종이 박스가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고는 연신 종소리를 울려대는 남자는 여전히 모금함을 앞에 두고 불우한 이웃을 돕자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어휴, 도움은 뭔 도움.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으로 다가가 지폐조각을 안에 넣고는 합장을 했다. 손이 저리기 시작했다. 역시 다 해진 장갑은 수레 손잡이의 서늘한 온도에서 손을 지켜주기엔 부족했다. 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듯했다. 먹거리 골목에 있는 가게를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더 힘차게 수레를 끄는데 뒤에서 크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할머니. 차도로 좀 다니지 맙시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무섭게 내 옆을 지나쳤다. 여전히 불우한 이웃을 돕자며 종을 딸랑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 추운데 오늘은 나가지 말라니까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편이 앓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당신 병원비는 그럼 가만히 있으면 나오나요.”

 내 말에 남편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에 수돗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넣을 파와 양파를 썰면서 나는 탁탁, 소리에 문득 귓가에 맴돌던 종소리가 떠올랐다. 불우한 이웃……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칼질을 하던 오른손을 멈추고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누워서 못 일어나는 남편, 곰팡이가 잔뜩 핀 천장, 이곳저곳 날아다니는 파리. 나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꺼버렸다.

 “여보, 오늘은 시켜 먹어요.”

 남편이 감았던 눈을 번뜩 뜨더니 제정신이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의 호통은 떨리는 내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먹었던 음식. 나는 곧장 자장면을 먹자며 집 냉장고에 붙은 배달음식 전단지를 떼어냈다. 밥 먹을 때만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편은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더니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게 왜 그러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깍, 소리가 들리자 나는 재빠르게 자장면 두 개를 달라고 말했다. 가격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잇따라 물어보는 주소에만 대답한 후 예,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 오늘 돈이라도 주웠어요?”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가운 바람이 꽉 닫은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내 팔에도, 남편의 팔에도 닭살이 돋았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내 보일러를 켜려고 일어났지만 남편의 눈치를 보고 이번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밖에선 커다란 헬멧을 쓴 남자가 철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문을 열자 남자는 철가방 안에서 자장면 두 개와 단무지를 차례로 바닥에 꺼내 올렸다. 그리고 짧고 퉁명스럽게 구 천 원이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그는 잔돈을 거슬러 주려 안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검은 헬멧을 썼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집을 둘러보고 있다는 걸. 그가 천 원을 건넬 때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 층 더 차분하게 느껴졌다. 맛있게 드세요.

 남편 앞에 자장면을 놓자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입가에 고인 침은 쉽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근데 왜 갑자기 배달 음식이에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단무지만 연신 씹었다. 차마 불우이웃을 돕자는 종소리 때문에 그런 거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걸로 며칠 동안 반찬 가짓수는 좀 더 줄여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우리 처음 만날 날에도 이 자장면을 먹었는데, 그렇죠?”


   다 먹은 그릇을 깨끗하게 닦았다. 남편은 안 해도 되지 않냐고 물었지만 둘 다 배달은 처음이었으므로 오늘은 그릇을 닦고 문 밖에 내놓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었지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발에 무언가 걸려 고개를 숙여보았다. 그릇을 놓았던 자리엔 군만두와 종이로 적은 쪽지가 있었다. ‘아까 서비스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맛있게 드세요.’ 고작 자장면 두 개 시켰다고 서비스를 주나. 나는 만두를 들어 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멀리서 다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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