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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Jan 07. 2023

우물 안 개구리



  ‘2022년 한 해동안 고마웠던 사람들과 함께.’

 엄지로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내릴 때마다 똑같은 문구들이 연신 떠올랐다. 이것만 보고 화면을 끈다고 다짐했지만 손가락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켜놓았던 티브이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시상식을 하던 연예인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줄어드는 숫자에 고개를 돌렸다. 숫자가 모두 줄어들자 해피뉴이어!라는 말과 함께 제야의 종소리가 울러 퍼졌다. 나도 울림에 맞춰 캔맥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톡 쏘는 탄산이 목구멍을 두드리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00시가 되게 무섭게 새로운 피드가 줄줄이 올라왔다. 반짝이는 배경, 부딪히는 술잔, 옹기종기 모여 찍은 사진. 반면에 작은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과자와 캔맥주, 몇 년째 누구 하나 발을 들이지 않은 단칸방. 나는 티브이를 끄고 깔아놓은 시트 위에 몸을 기대었다. 한 해가 지났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어버렸다. 분명 어릴 적에는 한 해가 지나면 가슴이 설레었는데 이제는 한숨이 끊임없이 나왔다. 책상을 정리하는 건 내일 아침의 내 몫이다. 지금은 그냥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할 것 같다. 창밖은 눈 한점 내리지 않았다. 희미한 달빛만이 창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행복을 드리는 편의점입니다.”

  오늘 내 기분이 어떻든, 어떤 손님이 들어오든 띠링, 소리가 들리면 꺼내야 하는 말이다. 새해 첫 손님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남자였다. 어제 과음을 했나 본지 아직까지도 걸음이 온전치는 않았다. 그가 계산대 위에 올려둔 것도 숙취해소제였다. 5,000원 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지폐에서도 술냄새가 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의 초췌한 얼굴과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부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나이도 내 또래로 보인 탓인지 안녕히 가세요,라는 매뉴얼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들어온 손님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바깥이 환함에도 불구하고 둘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앞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앞을 걷고 있었다. 결국 앞을 보지 못 한 여자가 진열대에 몸을 부딪히며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마를 탁, 짚은 나와 달리 남자는 떨어진 물건에는 관심 하나 없었고 여자의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콧소리가 잔뜩 섞인 여자의 괜찮다는 말은 내 팔에 닭살을 돋게 만들었다. 그래,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떨어진 물건을 도로 돌려놓겠지. 그러나 둘은 어질러진 바닥을 무시하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마일드 세븐 하나 주세요. 담배를 주고 건네받은 카드를 단말기에 꽂기까지 나는 어질러진 바닥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결국 커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의점을 나왔다.

  “어휴, 액땜이라고 생각하지 뭐.”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떨어진 물건을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가슴 한편이 멍한 이유는 뭘까. 올해는 담배를 끊기로 다짐했는데 절로 담배 코너에 손이 갔다. 편의점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늘 덩그러니 놓인 재떨이가 나를 반겼다. 늘 퇴근을 할 때면 안이 꽁초로 가득 차있는데 출근을 하면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재떨이였다. 야간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치우고 가는 걸까. 불을 붙이면 새하얀 연기가 적나라하게 피어올랐다.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후 입안에 가득 찬 연기를 내뿜으면 내 안에 채워진 근심도 함께 빠져나가는 듯했다.

  “총각, 꽁초 버릴 때 재떨이 안에 잘 버려줘요.”

  한참 담배에 심취해있을 때 리어카를 끌던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그녀가 주변을 오가는 건 여럿 본 적 있었지만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나는 예, 하고 짧게 답했다. 이어서 할머니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말하곤 다시 리어카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내게 새해 인사를 건넨 건 그녀가 처음이지 않았을까. 나는 천천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싶은 겉옷은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더 축 늘어져 보이는 듯했다.


  캔맥주가 바닥을 드러냈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이대로 잠에 들법한데 벌써 잠자리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대충 겉옷을 챙겨 입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 해의 두 번째 날, 캄캄한 하늘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흠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미끄러질 것 같았다. 보폭을 줄이고 발에 무게중심을 집중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낮에 본 할머니였다. 그녀는 편의점 앞에 놓인 재떨이를 검은 봉투에 넣고는 꽁꽁 묶어 쓰레기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어르신, 안 치우셔도 되는데 뭐 하러 이런 걸 하세요.”

  “아유, 나 아니면 아무도 안 치워요. 그러니 나라도 해야죠.”

  그녀는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눈이 쌓인 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낮보다 보폭을 잔뜩 좁혔다.

  편의점에 들어가자 야간 근무자가 나를 반겼다.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저 할머니가 재떨이를 치워왔냐고 물었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저기 반지하에 혼자 사시는 분인데 매번 제가 치운다고 해도 할 일이 없으니 이거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세요. 이젠 저도 포기하고 그러려니 해요.”

  맥주를 계산하고 문을 나오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일대를 재개발하는 걸 반대한다는 주민들이 걸어놓은 현수막이었다. 대충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아마 올해 개발을 시작한다고 하던데 그럼 저 할머니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쩌면 올해는 그녀에게 더 최악이지 않을까.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후드를 뒤집어썼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캔맥주를 끌어안고 광활하게 펼쳐진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나오는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겠지. 뭔가 나보다 더 최악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공허했던 내 가슴을 싹 비워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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