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베트남에 오기 전부터 자전거를 탈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자전거만 없었지 혹시 몰라 자전거 탈 때 필요한 복면이라던지 장갑 따위를 챙겨 왔으니까.
그래도 막상 출발하기까지 이틀간은 몹시 분주했다. 자전거를 산 당일 저녁에 자전거 수리점에 가서 흔들거리는 핸들을 조이고 안장 쿠션도 구매하고 벨도 달았다.
"묶는 끈 없어요?"
가방을 매달 끈을 찾으니 없단다. 수리점 아저씨는 앞가게 철물점을 기웃거리고 돌아와서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가게 한편에 달려있는 타이어줄을 내게 웃으며 내밀었다.
"프리! 프리!"
다음날은자물쇠를 사려고 시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각종 냄비니 국자니 쇠붙이들이 널려있는 코너에 자물쇠는 있을법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만물상 집 아저씨에게 자물쇠 사진을 내밀었고 아저씨는 한 아주머니 가게를 가리켰다.
"보자 보자, 이거 있지. 몇 개 필요해?"
유쾌하지만 장사꾼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아주머니는 자물쇠를 구하러 갔다 오겠다고 나를 가게에 앉혀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거 꼬땀꼬땀(cotton, 면) 엄마 사다 줘."
가게를 멀뚱히 지키고 있는 내게옆 속옷가게 아주머니가 팬티 몇 장을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물건을 구하러 갔던 아주머니가 자물쇠를 들고 돌아왔다.이어지는 흥정. 단돈 2천 원을 깎기까지 서로 웃고 있었지만 긴장감이 팽팽했다.
헬멧은 운이 좋게도 길을 가다 중고 헬멧가게를 우연히 발견해 하나 구매했다. 파란빛에 보라색이 섞인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베트남은 밥값이 저렴할지언정 공산품은 그리 저렴하지 않다는 사실. 한국에서야 무엇이든 덥석 사고 버리고, 당근에선 무료 나눔도 많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중고도 새것만큼이나 소중하고 어떤 물품은 한국보다도 비쌌다. 그건 어쩌면 내가 외국인이어서 더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훌훌 출발하면 좋았는데, 아직 큰 산이 남아있었다. 8킬로짜리 배낭을 내내 매달고 다닐 수 없지 않겠는가. 작은 가방만 남겨두고 큰 배낭을 다음여행지 캄보디아로 보내기 했다. 그건 다행히 캄보디아 프놈펜에 대학교 친구가 살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출발당일 아침, 나는 가방을 메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캄보디아로 이 가방 좀 보내려고요."
이러한 경우는 처음인지 직원은 이리저리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가능하다고 했고, 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중 전자헤드셋과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거부당했다. 한마디로 전자기기와 액체류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후로도 산 넘어 산이었다. 직원은 된다 안된다를 반복했다.
"가방이 박스에 안 맞아요."
"내용물을 분리해서 넣으면요?"
"그러면 되겠네요. 오 노!"
"이번엔 왜요?"
택배비까지 지불한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직원에게 물었다. 이번엔 또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택배비를 잘 못 계산했어요. 무게가 많이 나가서 돈을 더 내야 해요. 쏘리..."
진정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나는 괜찮다고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무모한 시도를 부탁한 것은 나니까. 하는 수 없이 나는 두 번째로 은행에 가서 돈을 뽑았다. 택배비는 6만 원에서 11만 원까지 늘었다. 그제야 내가 제정신이 아닌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튼 이제 나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하늘은 나의 이 정신 나간 여정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티 없이 맑은 햇살을 내비쳤다. 나는 자전거 수리점 아저씨가 준 타이어 줄로 작은 가방을 뒷자리에 단단히 조여 메었고 호이안으로 가는 첫 페달을 밟았다. 다낭 시내의 용다리를 건너 자전거는 점차 바다로 향했다. 나아갈수록 심장은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마구 뒤섞어 펌프질 했다. 빨간 신호등 앞에 서서 하늘 보았을 때 언젠가 꿈에서 이 장면을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지금 나는 본래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