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는 여행을 얼마나 멀리 떠나느냐에 따라 그 가치를 따질 때가 있다. 나는 엄마가 집에서 4시간 넘게 떨어진 강원도로 이모네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했을 때 괜히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가, 자주 가봤고 비교적 가까운 태안으로 여행지가 변경되었을 땐 잠깐 실망했었다. 그러다 여행 당일, 펜션 주차장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자 비로소 깨달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면 어디든 재밌는 여행지가 된다는 것을.
숙소는 파릇파릇한 풀밭 너머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 바로 앞에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었고 방마다 큰 창이 있어 드나들기 편해 보였다. 우리는 개미처럼 부지런히 차에 있는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각종 옷가지, 먹거리, 술, 쌀, 물놀이 용품 등. 하룻밤만 자고 가는데도 코로나 이후로 제대로 된 모임이 처음이라 들뜬 마음만큼 두 집 살림살이가 한가득이었다.
정리를 끝내고 숙소에서 한숨 돌린 우리는 바닷가로 나갔다. 사촌동생까지 넷이서 똑같이 파란 모자를 쓰고 길을 걸으니 무슨 동호회 같았다. 분명 이모네가 도착하기 전에 잠깐 둘러봤던 바다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따가운 햇볕이 빨리 바다에 뛰어 들으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난 마법의 기간이었고 물놀이를 하는 파란 모자 동호회에서 떨어져 다른 재밋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파란 모자 동호회
한 십여분을 걸었을 까, 바위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바닷물에 시선을 푹 숙이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라도 잡히는지 보니 소라게 여러 마리가 모래밭을 잔잔한 물결에 휘청휘청 기어 다녔다. 아빠는 바위틈에서 엄지 손가락 만한 게를 잡아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바위섬을 반바퀴 돌았다. 바위 한쪽 면이 경사진 절벽이었다. 그 가운데 여러 갈래로 해진 밧줄이 달려있는 걸 보니 그걸 잡고 올라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모험심 강한 엄마가 가장 먼저 돌들을 성큼성큼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엄마 뉴스에 날 일 있어? 내려와."
"야, 그거 썩은 동아줄이야. 내려와."
나와 이모의 만류에도 엄마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밧줄을 잡고 꼭대기에 이르렀다.
'저 꼭대기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떨까.' 궁금해지기 시작한 나도 맨발로 절벽을 기어올랐다. 다행히 매우 가파르진 않아서 조심만 한다면 어렵지 않았다. 결국 이모까지 올라와 셋은 정상에서 나란히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푸르른 바다가 햇살의 축복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뒷길로 올라온 아빠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정상 맨 끝에 서있었는데 마치 승리를 이끈 위인 동상 같아 보였다.
바닷가에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라면을 끓였다. 비록 물속엔 안 들어갔어도 물놀이 후에 먹는 라면 맛은 특별했다. 그리고 해가 조금 지기를 기다렸다가 바비큐 파티 준비를 했다. 챙겨 온 게 많은 만큼 상에 놓아야 할 것들이 어찌나 많던지. 쌈채소만 하더라도 상추, 깻잎, 당귀, 겨자잎에 김치 종류는 배추김치, 파김치, 겉절이까지 뭘 골라먹어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상에 둘러앉은 우린 잔을 여러 번 부딪혀 가며 반가운 마음을 나누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턱끝까지 배가 찬 나와 가족들은 호미를 챙겨 들고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썰물 때에 맞춰 조개를 캐기 위해서였다. 사방이 컴컴한 중에 부실한 폭죽들이 퍽퍽 터지고 조개를 캐러 나간 사람들의 불빛이 멀리서 어른거렸다.
"뭐가 없는데?"
호미질 몇 번으로 우린 이 바닷가엔 조개가 많이 없다는 걸 알았다.
"찾았다!"
한참 무식한 호미질만 이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 가뭄에 단비처럼 막내의 외침이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불빛 아래 실하게 생긴 조개 하나가 진흙이 뭍은 채 손에 들려있었다. 동생은 그 이후로도 두 개를 더 캤다. 반면 나는 열심히 호미질을 해보았지만 "이러다 여기 다 파겠다. 그 힘 아꼈다 할머니집 밭이나 파라!"라는 아빠의 놀림만 받았을 뿐이었다.
"폭죽놀이나 하자."
우린 조개 캐기를 포기하고 폭죽이 든 상자를 열었다. 처음엔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며 흩어지는 불꽃들이 나름 낭만 있어 보였으나 어째 분위기는 점점 개그물로 흘러갔다. 이모는 불을 붙이기가 무서워서 엉덩이를 뒤로 쑥 내밀고 덜덜 떨며 라이터를 켜는데 이모부는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여기저기 콩알탄을 터뜨렸다. 두 분의 투닥거림에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불꽃과 함께 화르르 피어났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밤이 깊어갔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 바비큐를 굽던 화로에 불을 지피고 오로라 가루라는 걸 같이 태우자 불꽃 색깔이 파랗게 변했다. 처음엔 신기해서, 그다음엔 마음이 편안해져서 계속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별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하루가 왜 이렇게 짧은 거야." 엄마는 아쉬워했다. 그렇게 다들 그 불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한참 밖에 머물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