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메타타 03화

니체와 좋은 글

모든 사고는 세계관과 인간관으로부터 출발한다

by 백오


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 아직은 그들 중 누구도 생존하지조차 않을 수 있다. 그들은 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찌 내가 오늘날 이미 경청되고 있는 자들과 혼동될 수 있다는 말인가? ― 나의 날은 내일 이후이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 태어난다.



니체의 매력은 학술성이 아닌 예술성에 있다.



이해된다는 것은 뭔가 매우 모욕스러운 일이다. 이해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희가 알고 있다고? ―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동등하게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술성은 텍스트와 그 안에 담겨있는 명료한 논리가 아닌 그 배후의 ‘사람’에 있다. 시에서는 역설법이 애용된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이다. 시는 논리적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니체의 시적인 텍스트에는 무수한 논리적 비약들이 산재해있다. 그러나 이성, 연역, 사변, 실체보다도 우선해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곧, 어떠한 사변적 유희가 있기 위해 반드시 '사전에 있어야하는 것', 그래서 '더 본질적인 것'이 불완전한 '사람'이라면, 엄밀하고 깔끔한 텍스트보다는 불온하고 덜컹거리는 텍스트가 더한 가치와 매력을 지니게 된다. 니체적인 글에 매력을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글을 깔끔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처세의 자세에 비유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속마음을 손쉽게 감추고 적절한 반응을 추출해냄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데에 능하다. 어떤 사람은 그런 부분에 있어 타인에 비해 미숙하다. 그러나 처세를 잘하고 말고가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를 따질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깔끔한 글을 쓰도록 필력을 타고난 이들이 있으나, 그 필력이 어떤 글을 '좋은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형식적 정제와 문필적 표현력보다도 글이 내보이는 '의미 공간'에 집중함으로써 '좋은 글'의 기준을 평가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그 기준만이 글을 평가하는 올바른 척도로 여겨진다. 형식은 '의미 공간' -너비 아닌 깊이의 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글이 담고 있는 지성적, 감성적 깊이를 높이는 것이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글의 배후에 있는 사람 -곧 문필가 본인의 깊이를 높이는 것이다.



깊이는 이질감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마주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 포섭함으로써 증대된다. 새로움의 섭입은 폭발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본래 글이 가장 잘 써지는 때는 불행할 때다.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 외로움 느낄 때 사람의 표현력은 극대화된다. 거부감은 일종의 불행이며, 사람은 자신이 원래 살던 방식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마주하였을 때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바로 그때 난발하는 표현, 사고, 감정들로부터 한없이 휘청거리는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사람의 마음 안에는 곡식이 자라난다. 고로 사실 문필가의 행복은 불행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 들뢰즈 등의 '예술적 철학자' -곧, 강단 철학자들에 의해 자주 “철학자가 아니”라며 격하되는 이들이 자기 안에 깊이 체화하고 있었던 태도이다.



나는 휘청이는 사람을 원하며, 휘청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정서적, 지성적 태풍이 바깥을 휘몰아칠 때 문밖으로 나서서 있는 그대로의 바람을 마주하는 이들을 원한다. 동시에 나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이다. 사람은 자신의 본능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을 갖는다. 그 본능을 어떻게 바꾸어야할 지,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 지를 사유하고 계획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끄러운 길만을 달리고자하는 버릇은 적어도 나에게는 사람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자갈밭에서 발목이 꺾이는 경험을 주기적으로 마주하는 이들은 사람 중에서 가장 사람다운 이들이고, 가장 큰 매력과 깊이를 갖춘 이들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바라는가? 이질성은 학습이 아닌 모험이며, 여행이 아닌 개척이다. 사유 놀이 -개념 던지기. 세상을 설명할 수 있고, 나의 주장을 확립할 수 있는 '습작'적인 제언들을 반복적으로 행함으로써 사유는 전개되고 완성된다. 니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초인', '영원회귀' 등의 개념 또한 그 배후에 놓여있는 '실존자'인 니체에겐 유희거리 내지는 장난감일 뿐이다. 세상을 설명하려면, 설령 그것이 불완전할지라도, 우선 무언가의 이론을 그물 던지듯 던져놓아야 한다. 주관을 형성하려면, 설령 그것이 아직은 빈약할지라도, 또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로 들릴 지라도, 질척거리는 갯벌을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걷듯 일단 행해야한다. 바로 이 점에서 난해한 글은 ‘읽기 쉬운 글’과는 차별화되는 가치를 갖는다.




‘평범함’, ‘정상임’을 내세우며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은 타인의 습작을 곱게 보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평생토록 걷게 될 길은 기질적으로 정해져있다. 몇몇 기질은 늦게 발견될 뿐이다.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큰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샛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높은 지위에서든 낮은 지위에서든, 사회의 절대 다수는 큰길을 걷는 사람들이 차지한다. 높은 지위에 올라있는 사람들은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혹은 ‘내 성공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바른 길 -본인들이 따르고, 또한 확립한 작법, 공부법, 훈련법 등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려 한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열등감 -본인은 정도를 통해 성공하고자 한평생을 노력했는데, 샛길을 통해 ‘손쉽게 성공하려는’ 이들이 있음을 바라보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끌어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것 -에 의해 ‘특이함’을 ‘이상함’, 혹은 ‘저열함’의 징표로 격하하려든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전위적 시도를 통해 지평을 넓히고 발전한다. 한국은 규율사회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모범자’ -규범 속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자’ -새로운 규율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많은 이들이 ‘인서울 대학’에서 온갖 인프라를 누리며 소위 말하는 ‘엘리트’로서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초적인 확신조차도 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망한다면 청년 세대의 소심함 때문에 망할 것이다. -이미 중년과 노년 세대는 ‘하던 일을 묵묵히’ 계속 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 기여로는 잘 되어봐야 현상 유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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