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걸음
점심시간, 혼자 교실에 남아있었다. 방송실에서 음악을 틀었다. 인피니트의 내꺼하자와 틴탑의 긴 생머리 그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될 때였다.
“은오야.”
누가 뒷문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마자 놀랐다. 경아였다.경아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내 인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매점에서 유리벽을 등지고 나란히 각자 빵 포장을 뜯는데 경아가 물었다.
“정유성이랑 잘 돼 가?”
“뭔 소리야. 경아야, 나 걔한테 진짜 아무 관심 없고 걔도 똑같아.”
“애들이 너랑 정유성이랑 썸 탄다고 그러던데?”
난 세차게 도리질했다. 내가 비밀을 얘기하려는 듯 몸을 숙이자 경아가 흥미 어린 얼굴을 했다.
“내가 너한테만 얘기해줄게. 정유성, 나 가지고 연극하는 거다.”
“왜? 진짜로? 무슨 말이야?”
경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말했다.
“걔 여자애들 질투 유발하려고 제일 만만한 나 가져다가 드라마 한 편 찍는거야.”
“아……나 뭔지 알 거 같아.”
이번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아가 말했다.
“정유성이 누구한테 관심 끌려고 그러는지.”
거센 쓰라림이 강타했다. 표정관리를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경아가 이어 말했다.
“내가 정유성이랑 그래도 몇 주 사귀어봤잖아, 걔 좋아하는 애 따로 있는거 같더라고.”
“누군데?”
“너 이지수 알아?”
“몰라.”
“그렇다는 얘기는 안 하지. 근데 그냥 심증 있잖아. 심증. 정유성 여자관계 엄청 복잡한거 알지?”
“들어봤어.”
“1반 이지수하고 한 번 사귀었는데 걔랑 헤어지고서도 걔 좋아한다는 소문 있었어.”
“와, 대박이다.”
난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웃었다.
“근데 너 정유성 좋아하잖아.”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내가 방금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정유성의 로맨스에 놀아난 엑스트라란 사실이 비참했다.
“거짓말. 다 알아.”
“나 좋아하는 애 있었어.”
난 경아가 넘어오게 만들기 위해 꾸며내기로 했다. 경아가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물었다.
“누군데?”
“옛날이야. 중학교 때.”
중학교 2학년 때 난 내가 같은 반 이지형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수련회 진실게임 때 털렸었다.
“거짓말 하지마. 누군지 말 못하잖아.”
경아가 비웃었다.
“진짜라니까.”
“근데 왜 누군지 말 못 하는데.”
“어차피 옛날인데 뭐.”
“그러니까 누구냐니까?”
난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만 알고 있어야 돼.”
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형 좋아했었어.”
경아가 푸하! 하고 놀라며 웃는데 종이 쳤다.
종례 전, 돌려받은 핸드폰으로 아빠한테 문자를 하는데 앞문이 열리며 이원우가 들어와 크게 소리쳤다.
“야! 김은오! 너 이지형 좋아해?”
정유성을 포함해 일동 날 쳐다봤다. 물론 이지형도.
“누가 그래?”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정유성이 물었다.
“그냥 애들이 그러던데?”
원우가 주춤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정유성이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김은오, 진짜야?”
난 못 들은 척했다.
하교하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정유성이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너 뭐냐? 너 막 두 남자 한꺼번에 좋아하고 그래?”
“뭐야, 깜짝이야.”
“아니, 대답을 해봐.”
“어...아냐. 나 이지형 좋아해.”
“그래? 언제부터?”
“중학교 때부터.”
“그럼 그 소설은 뭐야? 간절한 사랑.”
제목도 기억할 줄이야.
“그거 말했잖아, 친구들 보여주려고 쓴 거였다고. 너 주인공으로 한 팬픽 카스에 엄청 떠돌아다니길래 나도 따라 써본 거야.”
“너 친구 없잖아.”
“응. 친구 사귀려고 쓴 거야.”
정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정유성은 어깨라도 치고 갈 듯 찬 바람을 일으키며 쌩 지나갔다. 내가 길이라도 막는다 싶으면 손가락으로 등을 콱 찔러 밀어버리거나 괜히 공부하는 내 자리에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드는 등 가지가지로 불쾌하게 굴었다.
그날 밤, 당시 내 생애 최고의 명작이었던 ‘내 남자친구에게’를 읽으며 울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인소가 주는 감동도 정유성을 향한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어떻게 복수하지?”
이불을 내던지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네이버 학급 카페에 들어가 정유성이 올린 게시물을 찾아 댓글에 악담을 퍼부어놓았다.
그날 첫번째 시간이었던 미술수업은 수행평가였다. 손바닥 위에 세 사람이 올라가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정유성이 카메라를 잡았다.
“백삼십 발 더 들어!”
난 이미 발레리나도 울고 갈 까치발을 하고 서 있었다. 정유성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협조 좀 하라고.”
날 밀치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운동장 가에 있던 바위에 발목이 긁혔다. 상처를 보자 화가 났다.
“왜 너만 어색하게 나와?”
“니 눈이 삐었겠지.”
내 속에서 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뭐?”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
“너 때문에 우리 점수 깎이면 책임질래?”
“누가 봐도 나 팔 들었…”
“너만 사냐고. 다른 사람 마음은 안중에도 없냐?”
난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봤다.
“뭘 봐?”
“좀 천천히 말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걘 늘 말이 너무 빨랐다. 정유성이 고개를 뒤로 젖혀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쥐어뜯고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알아듣게 말해줄게. 너 이기적이고 느려터진 굼벵이라고. 어쩌냐? 지형이는 너 같은 스타일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해.”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정유성이 조용해졌다.
“야, 뭘 울고 그래….”
닭똥같은 눈물이 제멋대로 계속 나왔다.
“알았어, 알았어. 울지마. 알았다고. 너 팔 들었다고.”
정유성이 우왕좌왕하며 오줌 마려운 사람처럼 산만을 떨었다. 내가 등을 돌리자 돌려세우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며 어깨를 부자연스레 토닥였다.
“미안하다고. 어?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넘어지게 한 거 미안하고, 욕해서 미안하고, 소리질러서 미안하고….”
갑자기 날 덥석 끌어안았다. 내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놀라서 눈물이 뚝 멎었다. 어색해서 나오려고 몸을 들썩였는데 어찌나 힘을 주는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응? 제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팔을 빠르게 풀고 물러나 내 눈치를 보더니 뒤돌아 중앙현관으로 달려 사라졌다.
다음 교시에 음악실로 가는데 두 계단 위에 정유성이 날 막고 서있었다. 오른쪽으로 피해가자 가로막고 왼쪽으로 가자 또 가로막았다.
“왜.”
“지형이가 그렇게 좋아? 질질 짤 정도로?”
난 어이가 없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어쩔 거냐는 듯 쏘아붙였다.
“어.”
“가자.”
날 끌고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내가 거칠게 팔을 빼자 헤드락을 걸고 빠르게 걸어갔다.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 앞에 도착해 발로 문을 밀고 날 밀어넣었다.
“얘 상처 치료해주세요.”
난 떠밀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선생님이 다가오자 정유성은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친 쪽 발목의 양말을 내렸다. 발을 잡고 돌려 발목을 선생님에게 보였다.
“너가 좀 하고있어봐. 쌤 연고 좀 찾아올게.”
선생님이 빨간 소독약을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유성이 약을 내 발목에 갖다댔다.
“으, 야. 나 그거 싫어.”
바퀴 달린 의자를 뒤로 뺐다. 다치기만 하면 아빠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듯 사명을 띠고 빨간 약을 갖다 댄 악몽이 떠올랐다.
“나 그거 진짜 싫어해. 그래서 보건실 안 온 거야.”
정유성은 픽 웃더니 한 손으로 의자를 잡아당겼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발이 잡혀있었다.
“살살, 살살.”
내가 오만상을 지으며 협박하듯 말했다. 무릎을 꿇은 채 내 발을 붙들고 조심조심 섬세하게 발랐다. 따가워서 발목을 움찔거렸다.
“다행인 줄 알아. 쌤이 하면 인정사정없이 처발라.”
“병 주고 약 주니까 재밌냐?”
내 말을 무시했다. 정유성은 소독약을 다 바르자 상처를 조심스럽게 불었다.
“휴지로 다 닦아버릴거야.”
“뒤진다.”
“너 성격 진짜 문제 심각한 거 알지? 너 딱 그거야, 성격파탄자.”
난 정유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말하고 쌩 도망쳤다. 음악실로 들어갔다. 이미 종이 쳤고 아직 오지 않은 나와 정유성을 선생님이 찾고있었다.
“죄송합니다. 저 다쳐서 보건실 좀 다녀오느라고….”
“한 명은 왜 안 와? 그 잘생긴 놈.”
난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저녁에 집에서 인터넷을 켜보니 새 메일이 와있었다.
활동정지 스텝: 정유성
활동정지 사유: 비방
난 괜히 윈도우 세븐이 마음에 안 드니 컴퓨터를 바꿔달라고 아빠에게 문자로 불평을 했다.
점심시간,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는 점심 줄이 요란하고 길게 서있었다. 김치국 냄새가 지하 식당에서 솔솔 올라왔다. 봄 햇살이 복도를 산땃하게 비추고 계단 위에서 춘추복을 입은 애들이 무리지어 내려왔다.
“은오야~, 우리 여기 앉아도 돼? 자리 없어서.”
옆 반 미나가 나 혼자 있는 4인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대답하기도 전에 셋이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수다를 폭포수로 쏟아부었다.
“시험 끝나고 뭐해?”
“우리반 반티 언제 정한대?”
“진심 수학 분량 오바 아니냐?”
“아 노래방 가고싶다.”
“난 꼭 문과 간다.”
미나가 내 뒤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정유성이 다가와 테이블 옆에 섰다.
“맛있냐?”
난 화가 안 풀려서 못 본 척 밥만 먹었다.
“아니. 야, 너 박승민 봤냐?”
미나가 물었다.
“승민이 조퇴했는데.”
“아씨 그 새끼 아까 나한테 영어책 빌려가놓고. 야 니꺼 좀 빌려주라.”
“거절.”
정유성이 날 살짝 흘끔거리는게 느껴졌다.
“진짜 잘생겼다.”
“팔등신. 팔등신.”
“구등신 아니냐?”
미나 친구들이 대화했다. 정유성이 가 있는 곳에서 2학년 언니들이 시끄럽게 정유성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은오랑 친해지고 싶다.”
미나가 장난치듯 몸을 흔들거리며 말하자 당황한 난 좋아서 웃기만 했다.
양치를 하고 도서관에 들어갔다. 도서관 왼쪽 구석 책장은 후미진 벽에 협소한 공간을 두고 붙어있었다. 동으로 벽, 서로 책장, 북으로 벽, 남으로만 뚫려있는 내 아지트였다. 거기 있으면 사서 선생님도 잘 못 찾았다. 그 책장엔 절판된 책들, 삼십 년 전 유행한 책들, 오십 년 전 사전, 이십 년 전 교과서 등 신기한 게 많았다. 바닥엔 폐서 더미가 쌓여있었다. 늘 그 폐서 더미에 앉아 책을 봤다.
팔꿈치를 무릎에 지지하고 턱을 괸 채 책을 펼쳤다. 시간여행을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어린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 과거로 돌아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난다. 한창 내용에 빨려들 때였다.
“찾았다.”
난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유성이 옆으로 서서 날 보며 근사하게 웃고있었다.
“딱 걸렸어.”
내 앞에 다가와 서자 공간이 막혔다. 내 무릎 위로 에이비씨 초콜릿 봉지가 떨어졌다. 정유성이 벽에 기대어 섰다.
“너 수련회 안 간다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정유성이 자기 이마를 쳤다.
“아, 속 터져. 야, 너 무슨 대답 한 마디 하려고 입 뗄 때마다 천 년 걸리냐?”
고개를 들어 날 유심히 보다가 상체를 살짝 내 쪽으로 굽혀 천천히 곱씹듯 말했다.
“너 근데 진-짜 지형이 좋아하냐?”
왜? 어장관리 망해서 아쉽니?
“응.”
정유성이 다시 뒤로 가선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이미 다른 쪽으로 마음 떠 있는 애한테 보란듯 헤벌레 어장관리 당하고 있었다. 난 자존심을 씻기위해 일부러 연극을 했다.
“이지형 번호 알려주면 안되지?”
웃으며 슬며시 물었다. 정유성이 변동 없이 보던 앞만 보자 무안해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 잘라 말했다.
“니가 직접 물어봐.”
창피했다.
“알았어.”
가려고 일어나자 정유성이 막아섰다.
“뭐해? 나 나갈거야.”
“수련회 왜 안 가?”
가기 싫었다.
“왜 안 가?”
정유성은 항상 내가 끝내 대답을 할 때까지 집요하게 캐물었고,
“수련회를 왜 안 가?”
난 항상 집요하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너 친구 없어서 그러지?”
난 눈을 흘겨 떴다.
“내가 챙겨줄게. 가자.”
“싫어. 비켜, 나가게.”
“싫은데.”
코가 옷깃에 닿을락 말락 했다.
“비키라고.”
“수련회 갈 거냐고.”
“선생님!”
내가 외치자 정유성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미나한테 영어책 빌려주면.”
난 즐겁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6교시 쉬는 시간에 초콜릿 봉지를 소중하게 뜯으며 8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야 이거 정유성 거다!”
미나가 교실 안에서 영어책을 높이 들고 말하고 있었다.
“헐, 진짜? 야야야, 나 줘봐 줘봐.”
“야 나 한 번만! 나 만져볼래!”
“야, 우리 그림 그려놓자.”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보니 초콜릿 봉지가 반대쪽 면이 이미 뜯어진 채 테이프로 붙여져있었다. 봉지 안에서 종이 조각과 치킨 쿠폰이 나왔다. 종이에 미안하다고 쓰여있었다.
새빨간 일자 팬츠에 흰 티를 입고 학교에 오고도 완벽한 핏을 뽐내는 고등학생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을까? 수련회 날 정유성이 그랬다. 당시엔 스키니진이 아니면 바지가 아니었어서 통 큰 일자 팬츠는 굉장한 도전이었다. 딱 맞아 떨어지는 기장에 신발끈도 각각 흰색과 새파란 색으로 다르게 묶었다.
버스 앞쪽 자리 창가에 들어가 앉아 잠이 들었다. 한참 있다 눈을 떴을 땐 고속도로였다. 다들 자는 듯했다. 하품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정유성이 긴 다리를 꼬고 내 옆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씨, 아, 엎었다.”
게임 캐릭터가 죽어있었다. 내가 꺤 걸 보자 장난스레 웃으며 또 헤드락을 걸었다.
"켁." 난 거칠게 팔을 풀어버렸다.
“와, 스마트폰이 좋긴 좋다. 게임도 할 수 있고.”
“너도 바꿔달라고 해, 엄마아빠한테. 요즘 그 똥폰 누가 쓰냐? 핸드폰도 꼭 지같이 쪼끄만 걸로 써요.”
난 그 전 년만 해도 최신형이었던 내 노리폰을 켜서 아빠에게 스마트폰으로 바꿔달라고 문자를 했다.
“너 그 통 큰 바지는 어디서 난 거야? 비싸 보여.”
“통 큰 바지 아니고 와이드 슬랙스. 아는 사장님이 쇼핑몰 접는다고 옷 한 보따리 줬어.”
“왜?”
“모델 잠깐 서줬었어.”
정유성이 쇼핑몰에서 촬영했던 사진들을 보여줬다. 난 감탄사만 연발하며 사진을 봤다. 정유성이 핸드폰을 내 손에 둔 채 내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여 선생님과 얘기할 때 화면에 문자가 떴다. 이지형이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실수로 손가락을 헛디뎌 대화창을 열었다.
“남의 문자를 왜 봐. 내놔. 카스 볼거야.”
어느새 자세를 돌렸는지 내게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쏘아붙였다. 한참 티격대자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했다. 난 입 다물고 전주가 가까워지는 고속도로만 보다가 말했다.
“너 나중에 패션 사업하면 유명해질 것 같아. 트렌디하고 예민해.”
정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땐 전주였고 정유성은 내 옆에 없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앞에 있던 정유성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뒤돌아 누굴 찾다가 뒤에 있는 내게 다가왔다. 다짜고짜 날 밀어 앞으로 데려가 자기 옆자리에 털썩 앉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나, 둘, 셋!” “한 번 더!”
“무슨 모양 할 거야?” 애들이 물었다.
“하트 해, 하트! 옆 사람이랑!”
정유성이 한 말이었다. 난 왼팔로 하트 반쪽을 그려 내 옆에 있는 소희에게 갖다 댔다. 소희가 헷갈려하며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정유성이 내 왼팔을 잡아 내리고 오른팔을 들어 자기 쪽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공간지능이 없냐?”
자기 왼팔로 하트를 만들어 내 팔에 맞추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사진에 내 빨간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 다른 반 애들이 지나가며 사진 찍는 우리 반을 쳐다봤다. 충격적인 표정으로 나와 정유성을 번갈아 봤다. 대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근거렸다.
“하나, 둘, 셋!”
카메라 플래시가 하얗게 번쩍인 그 순간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사진이 있는걸 보면 그 모든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었나보다.
여름방학식 날 새로운 소문이 터졌다.
“김은오, 너 아직도 지형이 좋아해?”
등교한 내게 표현수가 물었다.
“지형이 고은새랑 사귄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로? 지형이랑 고은새랑 사귄다고?”
이재원이 다가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반에서 제일 예쁜 고은새 자리에 애들이 모여있었다.
청소 당번을 마치고 늦게 사람 없는 운동장을 걸어 하교하는데 정유성이 옆에서 불쑥 나타나 헤드락을 걸기에 미리 눈치채고 미꾸라지처럼 피했다. 정유성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작아서 못 알아들었다.
"뭐라고?"
내가 되묻자 얼굴이 빨개지며 어색하게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귀자고. 나랑."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질주했다. 돌처럼 굳어 앞만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정유성 얼굴이 붉게 열이 오른 모습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좋아하니까 사귀자 그러지.”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투였다.
“너 이지수 좋아하잖아.”
정유성이 우뚝 멈춰 서는 바람에 나도 멈춰 섰다.
“누가 그래? 내가 걔 좋아한다고?”
난 대답하지 않았다. 정유성이 말했다.
“그건…그냥 예전에 잠깐 그랬던거야. 신경 안 써도 돼.”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사실 이지형 안 좋아해.”
웃을 줄 알았던 정유성 표정이 가라앉았다.
“너 중학교 때 지형이 좋아한다고 진실게임 때 얘기했었다고 애들이 그러던데.”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찌푸렸는데 당황한 것 처럼 보였나보다.
“그래서?”
정유성이 물었다.
“어?”
“대답은? 내가 사귀자고 했잖아.”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벌건 태양에 넓은 운동장이 반짝거렸다. 난 행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