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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Mar 03. 2022

볼펜으로 쓰는 어른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것,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

어린 시절 어른들이 휘갈겨 쓰는 필체를 따라 하려고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꾹꾹 눌러쓰다 보니 지우개로 지워지지도 않는 연필의 흔적보다 볼펜의 잉크가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그것이 '어른'스러워서였을 지도 모르겠네요. 매일매일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 지울 수 없는 불안함을 볼펜과 함께 계속 써 내려가야 했던 어른의 마음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꿈을 좇아 치열하게 사는 삶 속에서 사소한 성공과 찬란한 실패를 되새김질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시킨 적 없는 실패를 만끽하며 내게 인생은 아직 희극과 비극 사이, 그러나 비극에 좀 더 가까운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맙니다. 실패라는 쓴 약을 매일 삼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실패'가 겨냥한 나의 과녁에 9-10점을 연달아 맞추는 날에는 그 고된 시간이 버거워 어른이 되기가 싫었나 봅니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상 위 물건들처럼, 해야 할 일을 정리하지 못한 미숙아의 흔적이라고 스스로 다독였습니다. 동선이 어지럽혀진 장난감같이 인생에 놓인 지저분한 버릇과 습관들을 치우고 '어른스러움'을 입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오답 투성이인 나의 시간을 언제든 되돌릴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면 더 나아질 거라고. 지금은 감기를 잠깐 앓았던 것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시간이니까.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쓰던 버릇은 모든 일이 귀찮듯 휘갈겨 쓰는 필체가 되어버린지는 오래.



자유롭게 메모하던 습관에서 어느샌가 지우개가 필요한 순간을 느끼게 됩니다. 성급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나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볼펜'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고 말죠. 휘갈긴 볼펜으로 잔뜩 메모된 페이지처럼, 그렇게 때가 묻어가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연필로 눌러쓰던 애가 볼펜을 쓰는 어른을 동경했었습니다. 단어의 뜻도 모르고 읽기만 할 줄 아는 아이에게 문체가 있는, 삶을 글로 완성해나가는 어른은 멋져 보이기만 했습니다. 지우개 없이 완전한 문장을 한 번에 써내려 가는 어른의 모습을 따라 하고 싶다고 늘 되내었습니다.



정작 어른이 된 지금, 과연 내 인생에 볼펜으로 쓸 만큼 소중한 이야기가 있을까. '밥벌이'라는 인생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살았던 하루하루를 볼펜으로 써내려 가다 지우지 못해 결국 쓱쓱 그어버리는 것을 반복하고 맙니다. 매일 똑같은 이야기밖에 없어서. 볼펜으로 쓸 이야기가 없는 지금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 살고 있는지.


여전히 어른이 된다는 것은 화려하고, 성숙하고, 멋진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부터 주머니 속 수첩까지 아직도 수많은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나름의 인생을 써 내려가는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그런 인상적인 이야기는 어디 있을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정성스레 써내려 갈 만큼의 소중한 이야기가 내게 있을까.



찰나 같은 오랜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삶을 비교하고 현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우개 없이 나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에 겁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썩 좋은 삶이었다고 믿는 이야기는 사소하지만 누구보다 찬란했다고 자랑하는 아이의 마음처럼,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결국 내 마음에 달렸다고.


나만의 버킷리스트, 이야깃거리를 조금씩 만들어 봅니다. 맛있는 것을 먹자. 예쁜 음악을 듣자. 그리고 글을 쓰자. 어제보단 오늘의 발걸음에 집중하는 시간 속 나의 흔적을 남기자. 오늘의 시간, 하루치의 인생을 반복하는 사람들, 그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영화보다 더 멋지고 극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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