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아픔에 머물지 않는 사소한 습관
어느새 '어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린 제 인생을 돌아보면 무엇을 하든 늘 '주저'했던 것 같습니다. 실패가 무서웠고, 이후에 듣게 될 비난과 비판이 싫어 어느새 도전하는 것도 무서운. 다른 사람에 비해 뒤떨어져서 경쟁에서 겨루기를 포기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다 잘될 거야'라는 말로 꾸며진 주변의 조언은 나보다는 덜 평범한 그러나 조금 특별한 사람들의 인생을 부러워 하기에 충분한 계기를 주었고, 해피엔딩을 위한 영화의 결말은 나의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믿음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미숙하고 서툰 몸짓으로 인생에서 넘치는 평범함을 감당해낼 즈음, 그렇게 모두가 두려워하는 취준생이 되었습니다. 나와 주변 이들의 고민은 수준은 달랐지만 닮아 있었고, 아무도 장담 못하는 미래의 불안함을 달고 '잘 되겠지'라는 나름의 긍정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대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우리는 어차피 다 비슷한 고민거리를 가지고, 거기서 거기인 직업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 마치 우리의 고민은 쌍둥이처럼 같다고 믿으며 일상에서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 위로를 나누는 것이 제게 조금은 특별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에서 나누는 고민 속에서, 서로에 대한 격려보다는 당장 각자의 미래에 집중하기 위한 순간이 더 소중한. 그동안 쌓은 노력들을 '취업'이라는 성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를 끝없이 소모하는. 그렇게 서로에게 표면적인 격려만으로 '무관심'을 실천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홀리듯,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꽤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눈앞에 놓인 하나하나의 목표에 진지하려고 노력했고, 나만의 '쓸모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을 쳐봐야겠다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잠깐이지만 '오래도록' 몸담고 있던 '취준생'에서 벗어난 지금, 조금은 '쓸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오류를 스스로 실천하며 자존감을 키워갑니다. 인생에서 얻은 작은 기회를 발판으로 사소한 움직임을 쌓다 보면 무언가는 이루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가지고.
다수의 인정이 곧 성공이라는 인식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끝없는 관심 속에서 나를 자책하게 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끝없는 관심이 당장의 나의 책임을 부추기고 재촉할 때 추락할 길밖에 보이지 않은 절벽 앞에 놓인 스스로를 경험합니다.
모든 실패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인생은 내게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탓하질 않길 바랍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그런 안목을 키우라고 섣불리 다른 사람을 탓하질 않길 바랍니다. 관심이란 이름의 질책과 조언보다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기다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정, '무관심'
무관심(無關心, Indifference)의 사전적 정의는 '관심이나 애정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때때로 나의 관심과 애정이 다른 이에게 부담이 되고 고통이 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이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무관심'이라면 10번이든, 100번이든 실천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모든 아픔과 실패를 기억하지 말자.
그것 말고도 기억해야 할 일은 이미 많지 않을까
아침 햇살이 유독 눈부신 이유는 지독하게 어두운 밤을 겪기 때문이라고 하죠. 새까만 어둠이 함께하는 이 밤, 새벽 1시를 넘어가는 매일매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관심'에 비해 가끔 왠지 모르게 따스한 아침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갑작스러운 즐거움, 그런 찰나 같은 시간 하나하나에 이유를 붙일 순 없겠죠. 그러나, 어쩌면 이런 모든 순간에 의미를 두지 않는 무관심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겪는 모든 아픔에 크게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아픔을 기억해야 성장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매일의 시간에서 아픔을 경험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픔을 기억하기보다는 당신과 내가 행복해야 할 이유, 그 시간에 머물길 바랍니다. 우리는 아프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