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낳고 복직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이전에 브런치에 쓸 정도의 소재라고는 “결혼 적령기, 이직” 이런 주제 정도였는데 이제는 훨씬 쓸 말이 많아졌다. 아기를 낳아야 어른이라는게 이런말인지 싶은 나날이다.
공부를 소름끼치게 잘한 적은 없지만 그럭저럭 잘해왔다. 변호사로서는 흔치 않은 이공계 학부 전공, 비지니스 그 이상이 가능한 영어 실력, 취득한 변리사 자격증 등등. 나름 학창시철 열심히 살아왔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이 소중한 내 변호사 자격증이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근무하며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도 쌓아왔다.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로 일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전문직 자격을 얻게 된 데에는, 그리고 얻게 된 이유에는 당장 몇 년 앞의 내 미래만 중요했지, 결혼 하고 아기 엄마가 된 나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중고등학교 땐 그 시절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느꼈고, 대학에 다닐 땐 대학생활이 영원할 줄 알았다. 별 관심이 없어 열심히 하지 않았던 동아리, 맨날 만나던 친구들만 비슷한 곳들에서 만나던 내 작은 약속들, 아무 일도 없는데 전공책을 들고 작은 가방을 메고 힐을 신고 버스를 타고다니던 나날들. 그건 내 인생에서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변호사가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세칭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는, 또 결혼하기 전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꼈다. 주말마다 이어지는 소개팅, 선.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인위적인 만남들. 어쩌다 있는 애프터, 그치만 이러다 결혼할 사람을 만날 순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집에 돌아오던 길들..
그러다가 “그”를 만나 결혼을 하고, 계획대로 결혼한 후 신혼시기를 지나 아기가 생겼다. 매 산부인과 진료마다 건강히 크던 내 아기. 역시나 태어나서도 튼튼하고 씩씩하고 밝은 내 아기. 아기를 낳기전엔 아기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도 당연히 안했지만 우리 아기가 유독 건강하더라도 내가 아기를 너무너무나 신경쓰고 애착이 강한 엄마가 될 거라는 생각도 안했다. 주변 친구들처럼 출산휴가 3개월하고 시터에게 맡기겠지, 다들 그러니까, 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출산을 했다.
출산 후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나는 정말 그럴 줄 몰랐는데, 새삼 내가 이렇게까지 애정을 쏟고 최선을 다하는 존재가 있었을까 싶었다. 무한히 무한히 희생하고 아껴주고 내어 주는 삶. 어릴 때 연애할 때의 달뜬 마음도 이렇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리 피곤해도 아기에게는 화가 안났다. 유난이란 소릴 들어가며 시터도 파트타임으로만 쓰고 이유식도 직접 해먹이고 유난에 유난을 떨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풀로 다 써도 복직할 때 아기 두고 가는게 눈물이 났다. 실제 복직하는 날 새벽에, 설사도 몇번 안해 본 아기가 갑자기 설사를 해서 울면서 시터와 엄마에게 연락해서 아기를 번갈아가며 봐달라고 하고나서 회사에 출근했다. 인사를 돌며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화장실에 가보니 니트를 거꾸로 입어 살에 닿아있어야 하는 ”100% WOOL”이라는 글자가 밖으로 나와있었다.
사실 육아휴직 기간 동안에는 가끔 눈물이 났다. 불쌍한 우리 아기, 짠한 우리 아기. 엄마인 내가 일을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학교갔다 집에 오면 엄마의 온기가 얘는 없겠구나, 하며 눈물이 흘렀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최선을 다했다. 병원이든 문센이든 씩씩하게 다 알아서 다니고(바쁜 남편은 덤이다) 시터가 와도 집에서 잘 안나갔다. 김밥 두세줄을 시켜서 종일 먹으면서 아기만 봤다. 복직하면 이렇게 못해줄테니까, 얜 그래서 짠한 아기니까. 막연하게 그런마음으로 복직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