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의 평범하고 지독한 PMS 일지
고통 시작 : 6월 5일 (수) 오후 ~
생리 시작 : 6월 11일 (화) 아침 ~
아, 이번 생리 기간, 진짜 개같다. 역대급이다. (현재진행형) 나의 인간성에 나조차도 의문이 드는 시점.
물론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까먹기 전에, 그리고 다음 번의 나를 위해 현재의 증상과 기분을 기록해본다.
# 생리 D-6 : 업무 회의에 집중하지 못함
오후부터 시작된 PMS 증상. 평일이었고, 기획팀과 광고 방향성을 수정하는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다. 이날 안건이 그닥 어렵진 않았는데, 정말 ADHD가 이런 기분일까, 집중을 하나도 못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 사람이 낸 아이디어가 뭔지, 그게 어떻게 이어지는지. 다들 나 빼고 잘만 논의한 걸 보면 정말 나만 이해를 못한 게 맞았다. 하다못해 사수가 나한테 의견 없냐고, 뭐라도 말해보라며 다그쳤지만 정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 생리 D-5 : 낮은 행동력 + 식욕 폭발
공휴일. 하루종일 이유도 모른 채 몸도 마음도 안절부절.
그래서 나름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근데 그마저도 우유부단해져서 할일 순서를 못 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부터 했다. 당연히 여기저기 왔다갔다 비효율적으로 쳐냈다. 생리 때 마다 늘 그랬듯.
점심 때는 매운 게 너무 땡겨 엽기떡볶이를 먹었다. 식욕이 미친듯이 불타서 밥도 볶아먹었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고칼로리 감자칩과 음료수로 후식까지 먹었다. 늦게까지 배가 안고팠는데도, 미칠듯한 식욕이 올라서 라면을 굳이 끓여먹었다.
# 생리 D-4 : 주량 줄어듬, 파워 즉흥
연차를 쓴 금요일. 차라리 쉬는 날인게 다행이었던 듯.
이날은 분명 아침에 영상 편집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컴퓨터를 켰더니 급 하기 싫어져서 안 했다. 그리고 문득 옛날 생각하다가, 전에 하던 취준스터디 톡방에 뜬끔없이 연락해서 안부를 물었다.
점심 때, 파스타 면을 평소의 두 배로 삶았다. 배부르면서도 식욕 때문에 꾸역꾸역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즉흥적으로 이태원에 놀러갔다. 책 읽으러 갔는데, 집중이 잘 안돼서 조금 밖에 못 읽었다.
저녁에는 남자친구를 만났다. 우울하고 다운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냥 취하기 위해 소주를 빠르게 마셨다. 평소와 다르게 겨우 1병 먹고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 생리 D-3 : 폭식, 집중력 바닥, 싸움
아침에 기분 전환 겸 따릉이를 탔다. 가장 좋아하는 노들섬에 가도, 뭘 해도 감흥이 없었다.
역시나, 파스타 면을 너무 많이 삶았고 맛도 없었지만 오기로 다 먹었다. 뭘 해야할 지 몰라 집에서 안절부절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 옆 동네 카페에 갔다. 그렇지만 한 시간도 못 있고 나왔다. 남자친구의 연락 말투, 텀 등등 모든 게 다 거슬렸다. 결국 그날 만났는데, 장난 하나 때문에 대판 싸웠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그렇게 화를 냈을 것 같진 않은데.. 싸울 때도 흥분이 되어서 침착하지 못하고, 그저 상황을 포장하고 끝내기에 바빴다.
# 생리 D-2 : 예민함, 연락 회피
영상편집을 하려고 했는데, 내 집중력은 한 시간이 최대였다. 그래서 조금 하다가 블로그 발행으로 종목을 바꿨다. 이날은 특히나 남자친구가 보낸 카톡의 양과 질이 죄다 거슬렸다. 그래서 나도 카톡을 잘 안 보고, 안 보내려고 했다. 싸울 건덕지를 줄이려고.
신기하게도 이날은 식욕이 떨어지고 배고픔도 안느껴져서, 아침밖에 안 먹었다. PMS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카페인이나 가공식품 섭취를 줄여야 겠다고 느꼈다. 밤에 오렌지 한 봉지를 사와서 잘라 먹었는데, 아주 조금 괜찮아졌다.
# 생리 D-1 : 또 또 싸움. 공격력 MAX
새벽 수영에 다녀왔는데 평소보다 운동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걸 느꼈다. 출근길에는 밑도 끝도 없는 부정적인 생각, 불안과 예민함에 안되겠다 싶어서 PMS 약을 알아봤다. 몰려 온 업무는 일단 무리없이 다 쳐냈다.
그러다 퇴근길, 남자친구한테 쌓인 불만이 터졌다. 이틀 전 싸움에 응어리가 남았고, 성의없는 연락 문제로도 폭발. 그래서 갑자기 밤에 전화 신청을 했다. 전화에선 그의 모든 답변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모든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두 시간의 긴 통화라 후반에는 집중도 안 됐고. 마지막에는 다시 상대를 공격하기 바빴다.
# 생리 시작 D-DAY : 모든 말에 시큰둥
커피 대신 생리통에 좋은 캐모마일을 마시고, 바빴지만 무리없이 일을 쳐냈다. 사수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라며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면서 파일 수정을 줬는데, 오히려 별 감흥도 없어서 슬프거나 기분 나쁜 감정도 안 나왔다. 갈수록 전보다는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집에 가서 매운 떡볶이 먹고(맛이 잘 안느껴짐), 자전거 타고. 이 날은 남자친구랑 한 시간 통화를 했는데, 대화 내용이 잘 와닿지 않아서 그런가, 나도 영혼없이 리액션했다. 어쨌든 안 싸웠다.
# 생리 D+2 (오늘) : 여전히 약간 예민
점심으로 매운 라면 먹음. 수동적인 남자친구에게 계속해서 서운함을 느끼고 갑자기 공격욕이 생겼다. 그래도 간신히 이성을 붙잡긴 했다. 성의 없는 단답을 보내긴 했다만. 스스로에게 모순을 많이 느꼈다. 내 입장을 확실히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간 일주일의 고통을 회고하며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PMS 극복 방법을 고민하다가 브런치 열어서 급 <생리일기> 연재를 시작했다. 뭔가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예민함이 좀 줄었다.
· 대표 증상
- 집중력 낮음
- 폭식과 후회
- 공격적 언행 (잦은 싸움)
· 개선할 것
- 입장을 확실히 정할 것. (상대방의 말에 따라 좌우되지 말 것)
- 비효율적인 하루에 너무 자책하지는 말 것. 그럴 수 밖에 없는 날
- 친구와 연인은 내 부모가 아니다. 나를 세심하게 보살펴 줄 의무가 없다. 화풀이 대상도 아니다
- PMS에 안 좋은 커피, 가공식품, 술, 맵고 짠 것을 먹은 것. 앞으로는 과일, 야채, 고기 위주로 먹기
- 약국에서 프리페민 사서 3달 간 먹어보자.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 잘한 것
- 엄마에게 조언을 구한 것 ("기분파가 되면 안 된다")
- 처음으로 과일을 먹고, 커피 대신 캐모마일 시도한 것
매달 찾아오는 일주일, 매번 마주하는 PMS. 늘 불쾌기록을 갱신했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지독했던 듯.
이걸 쓰는 지금은 생리 이틀 차가 끝나가고 있다. 최근 일주일 중 그나마 내 기분이 가장 나음을 느낀다. 그리고 생리가 끝나갈수록 더 나아지겠지. 이제 조금 희망이 보인다.
이번 생리를 통해 느낀 건,
아무 노력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도 이 고통이 미친듯이 되풀이될 거란 거다.
그래서 이제는 노오오오력 대신 의학과 약학의 힘을 빌려, 뭐라도 해볼 거다.
우선은 가장 부담없는 시작으로, 약국에서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약(프리페민)을 먹어볼까 한다.
세 달 정도 꾸준히 복용을 해야한다고 하는데, 향후 생리는 이번 만큼 센 폭풍이 올 지 안올 지 궁금해지네. 그것도 이곳에 기록으로 꼭 남겨야지.
-
많이 아팠고, 많이 힘들었고 많이 수고했다.
늘 많이 미안해, 내 소중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