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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Mar 28. 2024

엄마 간병기 8

2004년 2월


나는 당시 살던 집의 내 방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는 상상을 한다.

몇 개월 뒤면 재개발이 예정된 5층짜리 주공아파트의 3층.

꽤 넓은 단지였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벌써 대부분 이사를 했다.

오래된 창문들과 현관문들에 빨간색 락커로 엑스자 모양이 그려져 있고 단지 사이사이에는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다.


폐허 같은 느낌. 그런 느낌으로 나는 20대를 시작했고 그런 느낌은 지금까지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엄마는 그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집을 샀다.

그러나 아빠의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끝에 약간의 이득만 보고 팔아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인생을 내가 감히 표현하자면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는 내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 날 퇴원했다.

엄마는 비록 매우 부자연스러웠지만 걸을 수 있었고 병원 생활이 지겨웠다. 나도 내 동생도.

의사에게 퇴원 얘기를 꺼내자 조금 더 있는 게 나을 거 같다는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우린 결국 퇴원을 했다. 만약 엄마가 병원에 더 있었다면 그 뒤로 덜 절뚝거리며 살았을까? 알 수 없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문을 넘으며 나는 엄마에게 5만 원이 든 봉투를 줬다.

엄마는 그렇게 5만 원을 벌러 나갔다가 5만 원을 벌어 온 것이다. 그 사이 3개월이 지났지만.


엄마는 한 동안 방에서 대소변을 받아 주길 바랐다. 방바닥에서 일어나 화장실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병원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와 내 동생에게 천사라는 말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효자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병원을 나와서까지 그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대소변을 받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고 욕을 했고 때로는 때리기도 했다.

거기에는 천사도 효자도 없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가난한 아픈 사람과 절망에 빠진 그 아들만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낮에는 내 방을 최대한 어둡게 만들어 잠을 잤고 밤에 일어나 고물 컴퓨터를 들여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자살을 생각했을까? 아니다. 자살도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에 환자가 두 명 있었지만 내 동생은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동생은 동사무소에 방문해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고 우리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었다.

의료비 지원도 받아 친척들의 부담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엄마를 이끌고 병원에 다녀와 약을 타는 것도 동생이었다.

나는 엄마를 3개월 동안 간병했다는 핑계로 그 뒤로 오래도록 엄마에 대한 모든 걸 동생에게 떠넘겼다.

만약 내 동생이 없었다면? 그 답은 너무 뻔하다.


엄마가 퇴원하고 몇 개월 뒤 곧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를 떠나야 했다. 우리는 단칸방 월세집으로 이사했다.

그 사이 나는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신체검사를 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동사무소에서는 신체 멀쩡한 성인 남성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친구와 함께 군대 가기 전까지 일할 생각으로 아웃소싱을 통해 어느 공장 생산직으로 들어갔다.

몇 개월 전까지 펜과 문제집이 들려 있던 내 손에는 육각렌치, 망치, 드라이버, 스패너 그런 것들이 들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아무거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얻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그냥 엄마도 동생도 버리고 도망갈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엄마는 혼자 화장실을 다녔고 밥도 지었고 몇 가지 반찬도 했다.


엄마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이따금 나를 서리 맞췄다고 눈물을 찔끔할 뿐이었다.


나의 20대 초반에는 뭐가 있었을까.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나. 절뚝거리는 엄마. 세 사람이 간신히 누울 단칸방. 늘어나는 바퀴벌레. 공장의 기계 소리. 후줄근한 작업복. 다 떨어진 운동화. 

대학을 간 친구들 사이에서 학점이니 MT니 소개팅이니 나랑 상관없는 얘기, 어쩌면 나랑 상관이 있을 뻔했던 그런 얘기를 들으며 아무 말이 없이 내 처치를 비관하던 내 모습.


이따금 공장 단지 안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공장 작업복인 든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떠올린다. 그런 나를 이제는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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