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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Mar 21. 2024

엄마 간병기 7

2004년 1월


엄마는 다른 병원에서 새해를 맞았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날은 동생이 엄마를 간병했던 거 같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곧 고3이 되었고 곧 졸업하는 나처럼 학교를 빠질 수는 없었다. 당시 평일은 내가, 주말과 공휴일은 동생이 간병을 했다.

주말 그 이틀 정도를 병원과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유일한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동생은 엄마가 세 번의 뇌출혈로 입원할 때마다 간병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생의 의지가 아니라 상황이 그랬다. 나는 항상 간병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동생은 항상 간병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득 되돌아보면 그 시절 그 겨울 보일러도 없던 춥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며 학교를 다니던 동생도 나만큼, 따뜻한 병원에서 다소 절망적인 정신 상태로 간병을 하던 나만큼이나 힘들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자기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내 동생.

엄마를 간병하는 일은 내 몫이었지만 그 외에 거의 대부분의 일은 동생이 처리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동생이 없었다면 엄마와 나는 어느 날 신문 한편에 씁쓸한 내용으로 남겨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엄마를 옮긴 병원은 대학 병원과는 비교할 수 없게 낡고 좁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은 모두 이 세상에 있지 않을 죽음과 가까운 나이에 있던 다른 환자들. 그 환자들 틈에서 40대 중반의 엄마는 제일 젊었지만 그래서 사실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반복되는 간병 생활에서 이제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그 병실에서 누군가 '정 떼고 돌아가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에 대한 고민. 아마도 그만큼 자식들을 고생시키고 돌아가신다는 의미겠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말은 나에게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의사가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를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네, 계속 살아는 있어서 가족들이 고생 꽤나 할 겁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을 테지만 나는 엄마가 첫 번째 뇌출혈로 쓰러진 다음부터는 그 말에서 공포감을 느낀다.


어떤 간병인이 자신이 맡던 환자가 병원을 옮기자 나에게 돈을 벌러 회사를 나가고 자기가 엄마를 간병하겠다고 제안했던 일. 내가 간병인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됐던 그 사람. 당시 나는 하루 10만 원의 간병비가 무겁게 느껴졌고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다만 18년이 지난 현재도 간병비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충격이다.


그리고 나의 대학 진학.

나는 대학 원서를 쓰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인가. 안 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 여전히 구별되지 않는다.

엄마가 아픈 값으로 이래저래 친척들에게 받은 돈으로 대학 원서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다음은? 대학에 합격했다 치고 그다음은 어떻게? 거기서 내 생각은 막혀 버렸다.


엄마를 간병하며 병원에 있던 어느 날 담임선생이 전화를 해 이런 말을 했다. 너 장학금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대학 원서를 쓰지 않았다고. 점수가 아깝다고. 그렇지만 네가 알아서 결정했을 것이라고.

그래 그 결정. 그 뒤로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떠밀려 결정해야 했던 그런 결정들. 나는 결정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왜 나는 계속 무거운 결정들을 해야 될까.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무기력은 그렇게 차곡차곡 내 마음에 쌓이고 있었다.


그때 대학에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어떻게든 꾸역꾸역 대학을 졸업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알 수가 없다. 나는 내 인생을 밝은 쪽으로 힘겹게 돌리려고 하기보다는 고상한 실패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고상한 실패자.


지금까지도 나는 가끔 꿈에서 어떤 학교 교실에 앉아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를 반복한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것은 평범하게 대학을 갈 수 있는 그런 환경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 해 구정은 1월에 있었고 그 연휴 동안 거의 동생이 간병을 했다.

나는 그 연휴 때 친척들이 병문안을 오기를, 우르르 몰려와 엄마를 위로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황량한 간병 생활을 목격하고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다른 환자들의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좁은 병실 그 사이에서 엄마의 대소변을 받았던 동생. 전화로 울면서 그런 얘기를 하던 내 동생. 그 상황과 감정이 머릿속에 그려져 서러웠던 나. 그런 우리.


엄마는 꽤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왼편이 마비됐다. 매일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왼편 다리에 조금씩 힘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엄마가 걷는 꿈을 꿨다. 그래서 엄마가 병원 침실을 내려와 걷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실제로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진 지 2개월 정도 지나 천천히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쓰러진 뒤 처음으로 걷던 엄마의 모습은 꿈을 기억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이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절뚝거리며 걸어서 화장실을 가는 엄마.

세상의 한 편이 무너져 이제 엄마는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 뒤로 지금까지 엄마는 계속 그렇게 절뚝거리며 걸었다.

이제 절뚝거리며 살게 된 엄마. 그리고 역시 절뚝거리며 살게 된 나와 동생. 그 뒤로 우리 모두 절뚝거리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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