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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Apr 04. 2024

엄마 간병기 9

2019년 11월

나는 엄마가 처음 뇌출혈로 쓰러졌었을 때 언젠가 다시 쓰러질 거라고 예감했었다. 그런 불안감, 다시 내 삶이 엄마의 간병 생활로 뭉개져 버릴 거 같은 그런 불안감은이 이따금씩 떠오를 때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특별한 일없이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그런 불안감도 무뎌졌다. 분명히.


2019년 11월 중순


엄마와 매일 아침 통화를 하던 동생이 나에게 엄마의 상태가 이상함을 알린다. 엄마와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 내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다른 날짜를 말한다. 동생의 생일을 물었다. 다른 날짜를 말한다. 그때 나는 엄마가 뇌출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귀가 잘 안 들리나? 아니면 치매 증상일까?

그러나 엄마는 끼니때마다 식사를 잘 챙겨 먹었고 엄마의 외손주도 잘 알아봤다. 심지어 출근한 나에게 전화해 단감 꼭지에 바른다고 소주 한 병도 사 오라고 말했었다.


그러기를 이틀째쯤. 뇌출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기억 한 구석에 파묻혀 있던 그 뇌출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엄마를 데리고 평소 다니던 병원에 찾아가 MRI 촬영했다. 왼쪽 뇌에 뇌출혈. 그리고 엄마의 뇌혈관이 보통 사람들보다 적다는 소견. 의사에게 어떻게 해야 될지 물었다. 의사는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가서 그 병원 의사의 처방을 받으라고 말한다. 나는 엄마를 데리고 16년 전 엄마가 입원했던 그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와 나의 16년 삶은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 뇌출혈 진단을 받자 갑자기 나는 그 사이 삶은 원래 없었고 어제가 16년 전 그날,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었던 그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를 대학병원 응급실에 눕혀 놓고 나는 울었다.


16년간 나는 지독히도 엄마를 원망했다. 사실 우리 삶에 원망할 사람은 아버지라는 사람밖에 없었지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눈앞에 있던 엄마를 지독하게 원망했을 것이다. 당신이 뇌출혈로 쓰러져 나는 대학에 가지 못 했고 그래서 내 또래가 누렸을 그런 삶을 누리지 못했다. 당신 대소변 받는 일을 어린 나이에, 그것도 남자가 할 일은 아니었다고. 심지어 왜 그딴 남자를 골라 결혼해서 당신도 고생하고 그 자식도 고생시키냐고.

답이 없는 원망들이었다. 나는 내 모습이 불만족스러우면 그 모든 책임을 엄마 탓으로, 엄마의 뇌출혈 탓으로 돌렸다. 내 모든 불행의 근원이 엄마의 책임인 것처럼 무수한 원망의 말들을 쏟아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고개 숙여 듣기만 했었다.


내가 만약 16년 동안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고 따뜻한 말만 하며 정성껏 보살폈었도 뇌출혈이 다시 왔을까? 나는 동생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우리 모두 답을 알 수 없다. 비교해 볼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없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 뇌출혈은 경미한 편이어서 엄마는 나도 알아봤고 동생도 사위도 손주도 모두 알아봤다. 신체 기능도 특별히 이상 없었다. 다만 몇 가지 기억에서 오류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기억은 정확한 데 말이 헛 나오는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한 고민 없이 엄마를 간병하기로 했다. 회사에는 그 해 남은 연가와 다음 해 연가까지 끌어와 한 달 넘게 연가를 냈다. 그때 나는 엄마를 원망했던 시간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간병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16년 전의 나보다 모든 상황이 좋았다. 그래서 기분 좋게 엄마를 간병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나와 우리 가족의 상황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편하다. 하지만 어쩌면 엄마의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단지 담당 교수가 엄마에게 모야모야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건 마음에 걸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일반병실이 부족해 중환자실에서 열흘 넘게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겼다. 침대에서 대소변을 받아 달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이동식 폴대를 잡도록 해 역시 억지로 화장실 변기에 앉혔다. 이제 엄마의 대소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간병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병원 생활의 소소한 짜증들. 계속 화장실에 가자고 칭얼거리는 엄마.


옆 침실 외국인 간병인의 요란한 커튼 치는 소리와 엄마의 침대를 발로 밖으로 미는 모습. 그 간병인이 담당하는 불쌍한 환자가 기억난다. 엄마가 신경외과 병실에 있는 10일 동안 그 간병인은 단 한 번도 자기 환자를 휠체어에 테우지 않았었다. 가끔 저녁마다 찾아오는 그 환자의 아들이 자기 엄마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찬 말들을 건넸었다. 나는 속으로 그런 말보다 휠체어 한 번 더 태우고 돌아다니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환자는 지금쯤 나았을까. 아니면.


나는 엄마를 신경외과 병실에서 10일, 재활의학과 병실에서 10일, 그렇게 20일을 퍽 즐겁고 떳떳한 마음으로 간병했었다. 그 시간 사이에 가끔 16년 전 엄마를 간병했을 때와 겹쳐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다. 16년 전의 시절이 어제 같다는 묘한 위화감도 꽤 자주 떠올랐다. 우리의 행동은 그 시절과 달라진 게 별로 없는데 이제 나는 3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엄마는 환갑이 되었다는 그런 위화감말이다. 다만 전체적인 상황은 그 시절보다 좋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매일 엄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고 저녁이면 동생과 영상통화를 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엄마의 회복도 빨랐다. 또 다행히 2년 전에 가입했던 유병자 보험의 진단금도 받았다. 병원비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냥 여행 같은 입원이었고 간병이었다. 우리는 성탄절 10일 전쯤 웃으면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엄마가 아픈 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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