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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May 23. 2024

엄마 간병기 16

2022년 이후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나의 우울증은 거의 사라졌다. 그 부분이 나는 역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긴 변화에서 몇 가지 그 이유를 찾아보면 이렇다. 우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점이다. 병원에서는 저녁 8시 30분 정도면 대부분의 병실에서 불을 끄고 잠에 들기를 청한다. 나는 간병을 하기 전에는 그 시간에 잠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시간에는 잠들지 못하고 휴대전화와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했다. 그런데 주변이 어둡고 적막감에 휩싸이면 나도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10시 30분쯤이면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시 휴대전화를 보다가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5시 20분쯤 일어나 병원 밖에서 담배 하나를 태우고 샤워를 했다. 말 그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며 나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 오늘만 버티자. 나한테는 오늘 하루만 있다.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과거로도 갈 수 없다. 아무리 과거를 곱씹어 재해석해 보거나 다른 상황을 가정해본들 현재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또 내일도, 그보다 더 먼 미래도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아무리 내일을 걱정하고 상상해 본들 내일은 내 생각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오늘 밖에는 없다. 오늘만 잘 버티자.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울증을 낫게 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간병하며 생긴 변화 중 제일 아이러니한 점은 내 우울증이 거의 나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엄마는 퇴원할 때쯤 발병 초기 때보다 많이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엄마에게 세 번째 뇌출혈이 오고 대학병원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병실을 거쳐 재활병원으로 전원한 후 초기까지 엄마의 모습과 퇴원할 때의 엄마 모습을 비교해 보면 사람의 회복력이라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번 뇌출혈로 엄마의 기억력에게는 아마도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있었지만 이제 간단한 의사소통은 비교적 명확히 할 수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12월 초에 퇴원을 결정했고 동생 집에서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엄마가 동생 집에서 잘 적응하고 되도록 오래 생활한다면 나의 자유가 오래 연장되지는 않을까 하는 이뤄지기 어려운 소원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동생 집에서 그다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따라서 동생도 엄마를 돌보는데 한계가 있어 동생 집에서 두 달 정도만을 지냈다. 나와 동생은 요양원을 생각했다. 그러다 주간보호센터를 알게 되었고 상담을 받았다.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아침 9시 30분쯤 이송기사가 직접 엄마를 데리러 집으로 오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낸 후 저녁 5시 30분쯤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겠다고 한다. 요양원을 보내기 전에 우선 다녀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순종적인 엄마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 것에 적응하였다. 아침에 이송기사가 오기 전에 내가 엄마를 준비시켜 놓고 미리 집을 떠나도 혼자 이송기사를 잘 기다렸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까지 혼자 집에 있다가 잠을 잤다. 


다만 내가 집 안에서 해야 될 일은 물론 병원에서 생활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엄마가 세 번째로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늘었다. 그렇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집안일 모두와 엄마의 식사, 기저귀 처리,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에 엄마의 목욕, 그런 것들이 내 할 일이 되었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엄마는 코로나에 두 번에 감염되었다. 그때 엄마는 한동안 몸이 둔해져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방과 거실 바닥에 대소변을 흘렸다. 나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이런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라 엄마를 거칠게 목욕시키고 욕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분노는 몇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았고 엄마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엄마는 정말 나를 이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서는 어쨌든 내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그러니까 자신은 약자일 뿐이니 살아남으려면 나의 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떤 체념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고 시간이 지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하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엄마에게 화를 내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며 2년여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가 퇴원한 후 내 손에는 티켓이 한 장 쥐어져 있는 느낌이다. 엄마를 언제든지 요양원에 보낼 수 있는 티켓, 엄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한 자유로울 수 있는 티켓. 수없이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또 수없이 요양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할 것이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내가 평생 엄마와 함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요양원에 보내야 될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가능성 중에 뭐 하나 뾰족한 수는 없다. 다만 잠정적으로 만약 내가 결혼할 때쯤에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로서는 기약 없지만 만약 내가 결혼을 했는데도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 그땐 아마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보내야 한다. 다만 선후 관계가 반대로 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연애의 끈을 놓지 않고 엄마가 퇴원한 후 몇 번인가 소개팅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드물게 마음이 드는 사람이 생겨 잘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 아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일뿐이다. 그런저런 일들로 2년이 지났다. 상황에 적응하면 시간은 무섭게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2023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엄마가 처음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에 가정법원으로부터 엄마에게 한통의 우편이 왔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낸 이혼 소송장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아마도 엄마의 상태는 모를 테지. 그런데 집 나간 지 20년도 더 된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고 싶을까. 


동생과 이런저런 의논을 하고 무료 가정법률사무소에 방문해 조언을 들었다. 엄마는 실질적으로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평소 다니는 병원에서 의사소견서를 발급받고 나를 엄마의 특별대리인으로 하는 특별대리인 신청서를 가정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은 나를 특별대리인으로 결정했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그 사람의 이혼 소송장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엄마는 당연히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에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 준다. 엄마의 이혼 문제를 내가 결정해야 하다니! 나는 결혼도 안 했는데! 지금 엄마의 마음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엄마에게 어떤 생각이 있고 그걸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엄마는 자신이 결혼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복잡했던 결혼 생활과 이혼 문제를 엄마와 상의할 수도 없다. 엄마는 이혼을 원할까, 원하지 않을까?


나와 동생은 엄마의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한편으로는 엄마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많았던 결혼 생활을 끝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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