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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May 23. 2024

엄마 간병기 16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나의 우울증은 거의 사라졌다. 그 부분이 나는 역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긴 변화에서 몇 가지 그 이유를 찾아보면 이렇다. 우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점이다. 병원에서는 저녁 8시 30분 정도면 병실의 불을 끄고 대체로 어둠에 휩싸인다. 간병을 하기 전 일찍 자지 않던 나는 휴대전화와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했으나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에는 10시 30분쯤이면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5시 20분쯤 일어나 병원 밖에서 담배 하나를 태우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며 나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 오늘만 버티자. 나한테는 오늘 하루만 있다.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과거로도 갈 수 없다. 아무리 과거를 곱씹어 재해석해 보거나 다른 상황을 가정해본들 현재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또 내일도, 그보다 더 먼 미래도 없다. 아무리 내일을 걱정하고 상상해 본들 내일은 내 생각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오늘 밖에는 없다. 오늘만 잘 버티자.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울증을 낫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퇴원할 때쯤 엄마의 상태는 어땠을까. 

엄마에게 세 번째 뇌출혈이 오고 대학병원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실을 거쳐 재활병원으로 전원하고 초기까지 엄마 모습과 퇴원할 때의 엄마 모습을 비교하면 사람의 회복력이라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기억력에게는 아마도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있었지만 이제 간단한 의사소통은 비교적 명확히 할 수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12월 초에 퇴원을 결정했고 동생 집에서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엄마가 동생 집에서 잘 적응해서 되도록 오래 생활해 나의 자유가 오래 연장되었으면 하는 이뤄지지 못할 소원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동생 집에서 그다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덩달아 동생도 엄마를 돌보는데 한계가 있어 동생 집에서 두 달을 지냈을 뿐이었다. 

나와 동생은 요양원을 생각했다. 

그러다 주간보호센터를 알게 되었고 상담을 받았다. 아침 9시 30분쯤 이송기사가 직접 엄마를 모시러 집으로 오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낸 후 저녁 5시 30분쯤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겠다고 한다. 요양원을 보내기 전에 우선 다녀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순종적인 엄마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 것에 적응하였다. 아침에 이송기사가 오기 전 내가 엄마를 준비시켜 놓고 미리 집을 떠나도 혼자 이송기사를 잘 기다렸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까지 혼자 집에 있다가 잠을 잤다. 


물론 내가 해야 될 일은 늘었다. 그렇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집안일 모두와 엄마의 식사, 기저귀 처리,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에 엄마의 목욕 그런 것들이 내 할 일이 되었다. 


그렇게 2년여간의 세월이 지났다.

그사이 엄마는 코로나에 두 번에 감염되었다. 그때 엄마는 한동안 몸이 둔해져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방과 거실 바닥에 대소변을 묻혔다. 나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이런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라 엄마를 거칠게 목욕시키고 욕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며칠이 지나면 나아졌고 엄마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엄마는 정말 나를 이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서는 어쨌든 내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그러니까 자신은 약자일 뿐이니 살아남으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떤 체념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고 시간이 지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하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엄마에게 화를 내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며 2년여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가 퇴원한 후 내 손에는 티켓이 한 장 쥐어 있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낼 수 있는 티켓, 엄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대한 자유로울 수 있는 티켓. 수없이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또 수없이 요양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요양원에 보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언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내가 결혼할 때쯤에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기약은 없지만 만약 내가 결혼을 하고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보내야 할 것이다. 다만 선후 관계가 반대로 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연애의 끈을 놓지 않고 엄마가 퇴원한 후 몇 번인가 소개팅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드물게 마음이 드는 사람이 생겨 잘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 아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일뿐이다. 그런저런 일들로 2년여간이 지났다. 상황에 적응하면 시간은 무섭게 날아가 버린다.  


그러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엄마가 처음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 가정법원으로부터 엄마에게 한통의 우편이 왔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낸 이혼 소송장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아마도 엄마의 상태는 모를 테지. 그런데 집 나간 지 20년도 더 된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고 싶을까. 


동생과 이런저런 의논을 하고 무료 가정법률사무소에 방문해 조언을 들었다. 엄마는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평소 다니던 병원에서 의사소견서를 발급받고 나를 특별대리인으로 하는 특별대리인 신청서를 가정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은 나를 특별대리인으로 결정했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그 사람의 이혼 소송장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엄마는 분명히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에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 준다. 엄마의 이혼 문제를 내가 결정해야 하다니! 나는 결혼도 안 했는데! 

현재 엄마의 의중은 알 수 없다. 아니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있지도 않을 것 같다. 엄마는 자신이 결혼한 지조차도 모르는데 그보다 복잡했던 결혼 생활과 이혼 문제를 엄마와 상의할 수도 없다. 


나와 동생은 엄마의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한편으로는 엄마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많았던 결혼 생활을 끝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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