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 12월
농담
작업치료사가 엄마에게 현재 있는 장소에 대해 묻는다. 엄마는 서울이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일생에서 엄마가 서울에 살았던 시기는 엄마가 성인이 되고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약 6년이다. 그 후로 서울에 살았던 적은 없었다. 나는 엄마의 대답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의미이거나 모든 지역의 도시 이름이 서울이거나. 엄마의 대답을 듣고 나는 장난기가 생겨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여기 제주도야”
“에이, 무슨 제주도야”
엄마는 내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는 이 점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지금 실제로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제주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점 말이다. 그리고 엄마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제주도에 대한 어떤 개념이 있어 여기가 제주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그렇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서울이든 제주도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걸 정확히 아는 것은 어떤 중요성이 있을까.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잠시 담배를 태우고 오겠다고 말하고 하루 중 여러 번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가끔 간호사가 나에게 알릴 것이 있어 찾아왔는데 내가 없으면 엄마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다. 그럴 때 엄마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담배 피우는 모양을 만들어 입을 뻐끔하며 내가 담배 피우러 갔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알렸다. 이런 얘기를 다른 보호자들과 간호사들이 나에게 말해 알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행동을 웃기려고 했을까. 아니면 특별한 의도 없이 그 상징적인 행동을 따라 할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엄마가 본인의 행동이 우습다는 걸 알고 농담을 한 것 같았다.
간병인
병원에서 간병인들을 통칭하는 ‘여사님’이라는 이명에 나는 좀 거북한 느낌이 든다. 과연 그 '여사님'에 적합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 내가 봐왔던 간병인들은 환자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만 했었고 사실 그마저도 마치 선심 쓰듯이 생색내는 사람들이었다. 병실 안에서 환자가 분명히 옆에 누워 있는데도 환자에 대한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고 하루 간병비, 휴일 수당 같은 돈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 마치 들은라는 듯이 하는 그런 말들이 다른 환자들을 주눅 들게 만든다. 침대에서 떠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환자는 그저 묵묵히 누워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을 뿐이다. 가끔 간병인들은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인 것 마냥 행동한다.
내 생각에 간병은 환자의 가족이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여기에는 별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간병할 수 없는 상태라면 간병인의 손을 빌려야 된다. 그런데 그 간병인을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환자의 회복에 있어서 어쩌면 의사나 간호사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간병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간병인은 하루 종일 환자의 곁에 머무른다. 환자의 하루 생활 리듬을 관리하는 건 간병인이다. 간병인의 처치에 따라서 환자의 회복 정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환자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신뢰할 수 없고 또 의지만큼 행동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주변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간병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는 환자의 생사여탈권은 간병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간병인 중에서도 나는 외국인 간병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듣기로는 현재 상당수의 간병인이 외국인, 이른바 조선족 간병인들이다. 아마도 특별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도 상당한 수익을 보장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간병 업무의 난이도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그런데 나는 어떤 선입견으로 조선족 간병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국적을 떠나 대부분의 간병인들은 ‘여사님’이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병원에서 간병하는 동안 오직 한 명만이 ‘여사님’이라는 이명에 어울리게 환자를 돌봤고 그 사람은 조선족이었다.
병원
병원은 이제 거대한 공장이 된 것 같다. 시스템이 환자의 회복보다 상위 개념에 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때부터 엄마가 입원해 있는 4인실 방을 리모델링한다며 관리자와 직원들 여러 사람이 부선을 떤다. 나는 당연히 공사 중에 다른 병실로 잠시 이동해 생활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공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조치 없이 환자들을 휴게실로 이동시키고 저녁때까지 생활하라고 통보받는다.
그런 통보를 받고 관리자에게 몇 마디 언성을 높여가며 항의했으나 항의 말고 별다른 방법은 없다. 나이 든 환자들은 휠체어에 탄 채 휴게실로 옮겨 가고 병실 안은 요란스럽게 공사를 시작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언론사에 제보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왜 그렇게 영악하지는 못 했을까. 두고두고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곱씹으며 나의 영악하지 못함을 후회했다.
엄마가 재활치료 중 보행기를 잡고 걷는 연습을 할 때였다. 엄마는 힘들어서인지 재활치료를 하기 싫어서인지 걸으면서 어떤 듣기 싫은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북하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재활치료를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으로 얼굴을 붉히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재활치료실과 벽을 두고 너머에 있는 간호사실에서 한 간호사가 엄마의 신음 소리를 흉내 낸다. 그 따라 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내가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한 번은 참았다. 그런데 두 번째로 엄마가 내는 소리를 따라 하는 간호사의 소리를 듣고 간호사실 찾아가 항의했다. 이런저런 말들로 쏘아붙이자 간호사가 크게 당황하며 사과한다.
이런 비슷한 일들, 환자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병원 시스템의 최하위 존재로 대접받는 이런 일들이 몇 개 더 있었고 아마도 지금 어딘가에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퇴원
나와 같은 의학 문외한이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자료를 참고했을 때 뇌졸중 환자의 회복 골든타임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이다. 그 기간에 가장 빠른 회복을 보이고 그 기간이 지나면 유의미한 회복이 매우 더뎌진다. 그렇다면 엄마의 회복 골든타임이 끝나는 시기는 12월 중순쯤이다. 나는 그 한 달 전쯤 엄마의 퇴원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재활병원에서의 퇴원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의사가 퇴원하라고 할 때 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사에게 묻는 것 대신 이제 엄마가 더 이상 크게 회복할 것이 없을 때 퇴원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18년 전 처음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신체에 장애가 생겼고 엄마의 생활반경은 집으로 축소되었다. 몸만 불편했던 엄마는 그럭저럭 집안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세 번째 뇌출혈로 엄마의 생활반경은 방과 화장실로 축소될 것이다. 이제 엄마는 밥과 약을 먹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잠을 자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엄마 모습을 생각하면 마치 신생아나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아무리 엄마를 정성껏 보살펴도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지만.
엄마를 퇴원시키기 전 나는 4개월간 하루도 교대 없이 간병했다. 그래서 동생이 미안했는지 엄마가 퇴원하면 당분간 엄마를 자신의 집에서 맡겠다고 한다. 장기요양을 통해 엄마가 생활할 침대와 미끄럼방지 용품등을 동생 집으로 신청해 미리 설치하도록 했다.
엄마가 퇴원하면 나는 당분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엄마의 퇴원은 결국 나의 자유를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