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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Jun 06. 2024

엄마 간병기 18

안녕, 엄마

나의 장황한 답변서는 사실 별 의미 없다.

이혼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양쪽 모두 이혼을 원하고 딱히 재산 문제도 없다면 협의 이혼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장황한 답변서가 이혼소송에서는 의미가 없을지언정 엄마 인생에서도 또는 나의 인생에서도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2024년 1월 매우 추운 어느 날. 동생과 함께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재판정 앞 복도에서 대기석에 앉아 재판을 기다릴 때 무려 22년 가까이 못 봤던 사람이 곁에 있었지만 나는 되도록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얼핏 봤을 때 머리카락도 흉하게 거의 빠져 있고 옷차림새도 무언가 추레했으며 조금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은근히 담배 쩐내가 풍기는 그 사람은 내 기억에 비해 무척 왜소해 보였다. 아니면 실제로 나이가 들어 왜소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은 아주 신속하게 끝났다. 판사의 몇 가지 질문에 나는 네, 네, 몇 번 대답을 하고 이혼에 동의하는 서명을 마치자 재판이 끝났다. 나와 동생은 그 사람이 말이라도 걸 거 같아 부리나케 재판장을 나와 법원을 떠났다. 그렇게 엄마의 이혼 소송은 엄마의 결혼 생활의 무게에 비해서 아주아주 싱겁게 끝났다. 물론 이혼 소송에서 그 사람에게 위자료 청구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현재 주소지로 봤을 때 그다지 받아낼 것도 없을 것 같고 나와 동생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아마도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고 있을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위자료 청구 소송으로 지지부진하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그 사람과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엄마의 이혼 소송이 끝나 홀가분한 와중에도 집에 돌아오는 길, 그 사실이 나와 동생에게 무겁게 혹은 무섭게 내려앉았다.


엄마가 주간 보호센터를 가지 않는 어느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치 김밥 두 줄을 따로 포장해서 샀다. 점심쯤 일어나서 엄마와 나눠 먹을 생각으로 구입한 것이다. 사온 김밥을 싱크대 한 구석에 놓고 엄마의 아침 식사와 약을 챙겨주고 난 후 잠들었고, 나는 오후 1시쯤 일어나 점심을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을 자던 중 부엌에서 무언가 부시덕거리는 소리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보니 엄마가 식탁에 앉아 김밥 두 줄을 모두 먹은 상태로 은박지를 구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 순간 잠에서 덜 깬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엄마는 자신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묵묵부답이었고 한참 화를 내던 나는 제풀에 지쳐 엄마에게 점심약을 주고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는 화가 났을까. 나는 엄마가 김밥 두 줄을 발견했다면 한 줄만 먹고 나머지 한 줄은 나를 위해 남겨놓길 바랐다. 그 정도의 인지 능력은 있길 바랐는데.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사실 엄마에게 이제 기대할 것이 별로 남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기대하고 있고 그 기대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제 엄마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렴풋한 기대가 남아 있다.


요새 들어 엄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나의 이름조차도 모른다. 엄마에게 나는 아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옆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돼버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고 나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 만약 기억이 없다면 서로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낸다. 이제 어쩌면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엄마가 안쓰럽다. 엄마라는 어떤 관계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해도 엄마라는 존재가 안쓰럽다. 오직 그 감정이 나에게 엄마를 붙들어 매게 한다.




엄마가 처음 뇌출혈이 발병해 간병하게 됐던 2003년쯤에 나는, 나의 상황과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었다. 그래서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빈 공책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적고 싶었는데 도무지 써지지가 않았다. 그 당시에 나의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이것을 표현하고 싶어 글로 쓰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어떤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내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나의 감정은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이것을 세상에 꺼내놓으려고 하면 그 생기가 죽어버리고 세상에 널리 흩어져 있는 평범한 것들 중 하나로 변해 이미 죽은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 19살의 나는 언젠가는 이 감정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 흘러 2021년 어느 날에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에서였다. 엄마가 세 번째로 쓰러진 상황에서 도무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답답한 마음이었고 뇌졸중 환자, 가족 커뮤니티에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들여다봐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드라마틱하니(적어도 내 생각에)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몇 편의 글을 쓰다가 엄마의 상태가 안정되자 나는 글쓰기를 멈췄다. 사실 엄마가 안정된 후로 새로운 사건은 거의 없었고 하루하루 대체로 비슷하게 흘러갔다. 마치 나중 돼서는 별로 할 말 없는 지나간 대부분의 지난한 시간들처럼. 하지만 머릿속에는 내가 써놨던 글들이 항상 맴돌았고 언젠가는 시작한 것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시작한 것을 마무리하는 것, 그것 말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또 있을까.


그동안 엄마와 나의 인생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이 내가 쓴 글처럼 일단락되었다. 물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들이 앞으로 무수하게 남아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만 나에게는 특별하고 독특한 인생의 경험일지라도 그것이 글로 옮겨지면 어쩐지 지루해진다. 나는 지루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글이 지루한 글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의 엄마가 세 번 뇌출혈로 쓰러졌고 그래서 내가 세 번 간병했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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