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친히 마중까지 나오다니."
아침의 상황을 복기하고는 내놓을 변명거리가 시원치 않는지, 아라는 그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허리는 괜찮아요? 배드 버그는 없었고?"
자식 들여다보는 어미처럼, 진호의 감춘 허리며, 드러난 팔뚝을 세세하게 살폈다.
"편안한 매트리스와 포근한 이불로 꿀잠 잤다는. 수녀님이 부르는 찬송가에 깼어요. 더할 나위 없는 은혜로운 아침이었다는."
"허세는."
"처음이나 낯선 거지, 눈에 익으니 그냥저냥이었어. 이것저것 가릴 형편도 아니었고. 근데 싱글룸으로 옮기니 몸은 한결 편해졌으나 시야는 어제만 못하더라는. 사람이라는 게, 아니 마음이라고 해야겠지."
"양쪽 손에 떡을 쥐고 있다고 만족할까? 아니 본디 사람은 안 그런다는. 괜한 저울질 그만두고. 그러나 돈은 거짓말 안 해요."
"춘향이 아니죠? 밤새 놀은 사람."
"뚱딴지같은 소리 그만하고. 거듭 말하지만 언덕 위의 도시, 하늘 아래 우뚝 선 성당이라 눈만 돌리면 보여요. 잠자리가 편해야 하루가 편한 거고. 침대 광고도 안 봤나 봐."
껄껄- 그는 시원스레 웃었다. 그러고는 남은 감정을 추슬렀다.
"고마워요."
"뭐가?"
"이것저것,, 다."
"방의 용도를 알았음에도 충격의 파편들은 여전했어요. 교적부에 이름 올린 나도 흠칫했는데 하물며 진호 씨는 말해 뭐 해. 그럼에도 허허- 넘기는 그 모습에.."
하고픈 말이 아직인지 아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웅크리지 말고 긴 다리 쭉 뻗고 자라고. 지불한 만큼 다 누리라고요."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국 그리 되어버렸네. 짐짝."
"어?"
"춘향이도 그 누구도 아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밤새 내 걱정한 거니."
"걱정은.."
"걱정이 아니면.. 생각을 한 건가?"
그는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그녀는 슬그머니 흘겨보았다.
"아침밥 먹인 보람도 없이. 허튼소리는."
"아 맞다.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네. 타이틀 넘겨 줄게요."
"무슨?"
"종잡을 수 없는,, B형이라 불러야겠어. 생각에서 그칠 것들을 행동에 옮기다니."
곱씹어봐도 자신에게는 무리라는 듯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댔다.
"마음 가는데 절로 몸 간다는. 덧붙이자면,, 한국 사람 사는 곳에 한국 물건 왜 없겠냐만은, 미국 살다 온 그녀 왈,, 코스트코에 비비고 만두가 들어왔길래 반가운 마음에 쪄서, 구워서, 끓여서도 먹어 봤는데, 고국의 맛이 아니더래요. 거기에 포커스를 맞췄죠."
슬쩍 올라간 아라의 어깨 끝으로 보아 짐짓 우쭐대는 모양새였다.
"가톨릭 신자에게 아시시가 절대적 의미인 것처럼, 여행자에게 DEL GIGLIO 수녀원과 수녀님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암요. 수녀님의 확답 메일을 받고서야 비행기표를 결제했으니 말 다했죠. 객지 나가면 괜히 서러운 법, 하물며 남의 나라인데 말해 뭐해요. 불철주야 기도하고 수고한다 한들, 성직자 이전에 여인이니. 지긋한 연세에 고향 생각이 오죽하실까."
"달고나는 그렇다 쳐, 옥고시랑, 만주, 호박엿은 진짜."
"달고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두 개 가져왔음 어쩔 뻔했어."
"말 돌리지 말고."
"형제님은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겠지만, 수녀님은 아니잖아. 그런 날 입은 더 구준한 법, 계절마다, 해마다, 인편으로, 소포로, 고향의 멋과 맛은 배달될 테지. 가톨릭이 원체 보수적인 단체인지라 포장 박스는 매번 달라도 안의 내용물은 동일할 테고,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국물의 민족 아닙니까! 가을의 끝자락은 이탈리아의 우기 시작점이니 뜨끈한 국물과 함께 고향 생각 하시라고 애초의 계획은 라면이었는데, 이민 가신 고모의 도움을 좀 받았지. 반신반의했는데, 성공할 줄은 몰랐네요."
다소 과장되게 어깨를 추켜올리더니 아라는 말을 이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일할 때였어요. 나이트 근무는 신입 차지, 안전상의 이유였는지 일곱 살 많은 남자 매니저와 짝을 이루게 했어요. 새벽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을 난생처음 알게 된 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고 빈 택시는 고사하고 지나가는 택시도 눈에 띄지 않자, 첫차 기다릴 겸 맥주나 마시자며 끌고 간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찾으러 어슬렁 거리던 중, 만주 앞에서 멈칫하더니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주전부리라고,, 멍하게 서 있더라고요. 지우개 가루를 먹은 듯 텁텁하고 꽉 막힌 느낌이랄까? 밀가루 피와 앙금 속이 침과 한데 뭉쳐 꿀컥 삼키기도 힘들었고, 맥주 한 캔을 다 먹고서도 개운치가 않더라는. 해서 엄청 투덜거렸더니,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만주의 참맛을.'
기껏해야 7살 차이,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짐짓 으스대잖아. 이름뿐인 허수아비 되어 이 바람 저 바람에 휘청이던 그동안의 모습들이 촤라락- 넘어가는 바람에 어찌나 웃음이 새어 나오던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어 댔는데. 이민 가신 고모가 고향땅 밟으셨다기에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옥수수, 옥고시, 만주가 한가득,, 그게 늘 생각이 나셨다고."
"고향이, 추억들이 그리운 거지."
"맞아요."
"외할아버지의 방문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어요. 보채도 꿈적 없는 엄마였지만 할아버지는 달랐으니. 우산 모양의 통 안에 담긴 알록달록한 초콜릿을 원한 내 바람과는 달리 늘 양갱을 사주셨어요. 한두 번이던 실랑이가 서너 번으로 늘어나자 결국 나도 할아버지도 포기를 했지만. 근데 희한한 건 양갱만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요. 당신을 기억해 달라고 그리 하신 것은 아닌지."
"근데, 만주 사면서 그 선임 생각 하나도 안 나던데."
어이가 없는지 진호는 그저 말이 없었다.
"농담이에요. 내 기억엔 외할아버지뿐, 친할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거든. 평소 반주를 즐겨하시던 할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소주 대꼬리를 사러 갔어요. 어떤 날은 한 잔, 다른 날은 반 잔을 비우시고는 '우리 아라 손잡고 사 와서 그런지 엄청 달다. 달아.' 허허- 웃으시고는 늘 다음을 기약하셨어요.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의 병환도 병환이었지만, 엄마가 힘들어하시던 기억이 더 커요.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 놀라시던, 혹여 나쁜 소식일까 싶어 전전긍긍하셨으니. 한밤중 컴컴한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모습도 자주 뵌지라, 여든을 넘기고 가실 때 다들 호상이라 했지만 그럼에도 얼마나 우셨는지, 한동안은 네 엄마가 아닌 할아버지 딸만 같아서 철없던 마음에 그게 또 싫었어요. 그런 기억들이 먼저라 부러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맞잡았던 손의 느낌은 몰라도 바라보시던 따스한 온도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내리사랑이라고, 당신 판박이인 딸이라, 그 많은 손주들 두고 넘치게 쓰다듬어 주셨는데.. 참 우리 할아버지도 양갱 좋아하셨어. 슈퍼에 가면 꼭 사곤 하셨지. 베이지색 상자 속 은색 종이 안에 담긴 말캉거리는 그것을 맛나게도 드셨거든. 지금도 여전해서 나도 할아버지 생각나곤 해."
"불쑥하고, 문득하고 생각날,, 추억이란 그런 거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쓸 카드는 아니었는데."
"응?"
"다분한 속셈 아닌 오롯한 선물로 드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죄인이라도 된 양 진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왕 생색낸 김에, 어쨌든 다 네 덕이예요."
"i owe you."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원스레 웃었다.
'이탈리아의 비옥한 농지, 언덕 위의 마을, 아름다운 산수가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가진 곳, 움브리아주..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움브리아는 곡선의 시골길, 올리브 과수원, 완만한 언덕, 유서 깊은 마을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많은 성인이 탄생한 종교적으로도 숭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이탈리아의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예스러운 언덕 위의 마을에서 이른 저녁 현지인들과 어울려 이곳만의 감칠만 나는 와인을 맛보고 마을 광장까지 산책을 즐겨 보기를.'
여행을 준비하면서 쉬이 접했던 움브리아주를 소개하는 글이었다. 글자는 글자를 밀어내, 텅 빈 여백은 금세 한 폭의 풍경화로 펼쳐진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너도 나도 흔들어대어 폭발한 싱싱한 내음은, 저만치 높은 로카 마조레를 시작으로 프란체스코 성당을 건들고 코뮤네 광장을 물들여 종내 아시시를 덮쳤다. 마치 분화구에서 솟구쳐 오른 용암처럼 산자락 아래로 흘러내린 그것들은 정작 뜨겁기는커녕 달큼했고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현대 음악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귀에 익은 자연 장음계도 자연 단음계도 아니었다. 꽃망울이 터지듯, 제 몸을 흔들고도 모자랐는지 이윽고 번진 소리들은, 들어오는 빛을 이리저리 반사시키고 굴절시켜 반짝거리는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빛의 반사와 바람의 세기에 의해 각기 다른 음이 되어 흩어졌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를 만났을 때, 천상의 소리라 말들 한다. 그렇게 일단락 지을, 흔한 말로 명명할 것이 아니었다. 다시금 불어오는 훈풍에 푸른 하늘 사이로 뭉실한 구름이 걸음을 재게 놀렸고, 그 아래 초록빛 물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넘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혹 찰나의 순간일까 싶어 더럭 겁이라도 났는지 살랑이는 바람을, 기세등등한 빛을 스스로 이고 진 그들은 그 근원지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근데 좀 의외라는. 당연 프란체스코 성당일 줄 알았는데."
"소시지는 제일 나중에 먹었어요. 그렇다고 로카 마조레가 시시하다는 건 아니에요."
"어쨌거나 좋네요. 눈도 코도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조용해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본 진호는 만족한 듯 웃었다.
"공기도, 바람도 더없이 좋지만, 쨍한 하늘이 제일. 해서 가까이 보고 싶었지."
언덕 위의 도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의 돌난간에 앉아 아라는 깜냥 손을 뻗었다. 그런다고 하늘에 닿을 리 만무하나 그렇게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나 보다.
"한동안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그거 키 크는 꿈인데."
"맞아. 중 2학년 때 8센티가 자랐으니. 그러고는 키도, 꿈도 끝이었는데 한참이 지난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두려움보다는 떨림?? 나쁘지 않은 그런 떨림.. 여자들이 인형에 옷을 입힐 때, 남자들은 제 몸에 망토를 두르잖아. 승리의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몸에 칭칭 감은 석고 붕대를 바라보던 그 반짝이던 눈빛들을 기억해. 꼬마 때 팔에 깁스한 적이 있어 그 불편함을 알기에, 다리는 몸의 주축인지라 고통은 몇 곱절일 테지만, 그럼에도 높은 곳에 올라오면 그냥 맘이 편하고, 엉덩이를 붙이면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앞서요. 미켈란젤로 언덕 돌 난간도 그렇고 여기서도 마찬가지."
그러고는 몸의 중심을 표나게 앞에다 두었다. 이에 놀란 진호는 아라의 팔을 홱 낚아챘다. 마주한 그의 두 눈이 적잖이 꾸짖고 있었다.
"비명횡사는 나도 반대라. 막연한 설렘 때문인가?
보란 듯이 아라는 몸의 각도를 다시금 기울였다.
"하지 말래도."
빤히 보는 진호와 비뚜름한 눈을 한 아라가 만났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무슨?"
"큰이모부 소원은 단 하나, 당신보다 이모가 하루 더 사시는 것.. 사나이의 순정이던가!! 농익은 부부애던가!! 하며 엄청 설렜는데, 정작 당신 끼니 걱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제웅 만들 뻔."
"제웅?"
"짚으로 만든 사람 모형의 물건. 사극 보면 간간이 나오잖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럼에도 아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걱정 아닌 활용가치 아직이니.."
아라가 흥- 하자 진호는 치- 하며 맞장구를 쳤다. 시답잖은 말장난보다야 펼쳐진 경치가 구미가 당기는지 그는 광활한 대자연으로 두 눈을 던졌다.
"정곡을 찌른 건가?"
약을 올리듯이 아라는 밉살맞게 굴었지만 저 너머의 거방진 산등성이처럼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모습이 뭐라고, 것도 눈길을 잡는지 아라는 짓궂은 장난을 걸었고, 성가신 듯 그는 부러 몸을 틀었지만, 그늘진 구석 하나 없는 훤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궁금했는지 저 멀리서 불던 바람이 참지 못하고 그들 곁으로 바짝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