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27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아시시행 Regional 안,, 십여 분 남짓 남은 출발 시간은 열차의 육중한 두 바퀴를 맘 놓고 쉬게 했다. 흔해빠진 사랑의 방정식처럼 플랫폼의 그 남자는 표정으로 한 번, 동동거리는 발사위로 또 한 번, 보란 듯이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번 역은 사랑이지만, 다음 역은 이별일 테지.'
여느 때와는 다른 감정선으로 아라는 독하게 훈수를 두었다. 도통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기차의 바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한차례 시동을 걸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이어 꿀렁- 하며 좀 전과는 달리 느릿하게 움직여댔고, 그로 인해 창문에 가득했던 그도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텅 빈 플랫폼, 마음은 허했고, 눈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되는대로 차창에 시선을 던진 순간, 정남쪽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나아가는 해가 심술궂게 장난을 쳤다. 찌를 듯한 빛의 움직임에 아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scusi."
낯선 언어에 자동 반사하여 차창에 맞닿은 좌석에 몸을 밀착시키고, 복도 쪽 좌석을 제 자리인양 차지하고 있던 끌낭을 잡아채 경계선을 세웠다. 마치 38선을 긋듯 말이다. 눈을 감은 채로 참 일사불란하게도 움직였다. 좌석에 몸을 욱여넣는 움직임, 끌낭 바퀴의 소음, 예상했던 익숙한 소리에 뒤이은 톡톡-, 생경스러운 음의 파동이었으나 관심 두지 않기로 했다. 해서 왼쪽 귀를 열어 흘려보냈다. 톡톡- 물체의 진동으로 인한 파장은 다시금 아라의 귀청을 때리고 슬그머니 도망을 친다. 이쯤 되니 확인이 필요했나 보다. 소리의 아우성뿐이었다만 그럼에도 몸을 더듬어 확인을 한다. 겹겹이 친 울타리 안의 안전을 확인했으나 오를 대로 오른 호기심은, 울타리 밖을 엿보게 했다. 끌낭 위에 자리 잡은 누텔라 과자가 까만 눈동자에 선명히 박혔다. 두 시간 남짓한 동행에 대한 인사치레일까? 그럴싸하게 포장한 자국민의 오지랖인가?
"감사합.. Grazie."
예상치 못한 순간 모국어는 즉각 반응을 했다. 어쨌거나 감사함을 표했다. 아시시까지 조용한 여정이길 바랐기에 목소리는 반갑게, 그러나 시선은 바로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벼락같은 호통에 반쯤 감은 두 눈을 똑바로 세웠다.
"똑똑한 척은 혼자 하고 실상은 이러니. 나 원 참."
"뭐.. 예요?"
놀랐는지 목소리는 절로 떨렸다.
"습관처럼 집어 들었지 뭐야. 말 안 했다뿐, 내 취향은 아닌지라. 먹기는 싫고, 남 주는 건 더 싫고, 버리면 벌 받을 거 같아서,, 주인 찾아 주려고 왔지. 의심만이 살길이라더니, 그런 사람이 날름 받나. 타고난 거짓말쟁이구먼."
"해서 그거 확인하려는? 인형 아닌 먹거리였으면 엄마 손 대신 유괴범 손 잡았을 거라고, 귀에 딱지 앉게 들은 말이라, 보기와는 달리 식탐 많다는. 두 번 안 물어요."
커다랗게 키운 눈을 앞세운 것도 모자라 빤히 바라보는 아라의 시선이 심히 부담스러웠나 보다.
"포로로마노를 접했던지라. 베수비오 화산이나, 폼페이 유적지나,, 결국 온전치 않은 듬성듬성 놓인 돌덩이일 테고, 프란체스코 성인의 축일은 지금뿐이니, 해서 경로를 재탐색했고, 마침 아시시행 기차가 출발하길래. 덧붙이자면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진호는 재빨리 곁눈질을 했다.
"갈팡질팡하는 심정을 굳이 함구했던 것은, 당신 깜냥은 로마까지라 하지, 해서 짐짝 신세는 면하려고."
구구절절 진호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궁색한 변명으로 와닿았나 보다.
"어디서 약을 팔아."
표정으로나 말투로나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공법만이 답이려나?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아쉬움의 포옹이 아직이라면."
그때였다. 양팔을 벌리고 몸의 각도를 단번에 기울인 아라가 진호의 품 안으로, 아니 그를 감싸듯 덮쳐왔다. 그녀의 몸사위가 다분히 공격적으로 느껴졌는지 이에 깜짝 놀라 허리는 좌석 손잡이에 아슬하게 걸치고, 상체의 중심은 복도 쪽으로 멀찌감치 물리는 진호의 몸사위는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아직이라며. 할 거 하고 Tiburtina 역에서 내리면 되겠네. 곧 도착할 테니. 테르미니 역까지 되짚어도 10분 내외, Regionale 열차는 지나치는 법이 없으니. 바가지요금이라 그렇지 철도 시스템은 독일 못지않다는."
아라의 입 모양도, 새어 나오는 음의 파동 역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스멀대는 화를 참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는 본인의 주특기인 목소리로 그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참에 성당오빠 해보렵니다."
"얼씨구."
느릿느릿 움직이던 기차의 바퀴는 이내 적응한 듯 빨라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풍경 하나 없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아라였다. 그것은 평온해진 표정을 보여주기 싫어 취한 행동이었으나, 제 속도를 내는 기차가 그저 반갑기만 한 진호에게는 이를 눈치챌 재간이 없었다. 팽팽했던 시시비비는 어느새 시들해졌다. 그런 그들의 암묵적 합의에 부응한 걸까? 칙칙폭폭 소리와 하얀 연기는 없었지만, 점만한 여운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기차는 앞을 향해 시원스레 나아갔다.
"미치지 않고서야."
훈훈한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는 5월의 중순, 팔뚝에 돋아난 때아닌 소름의 흔적을 쓱- 문질러 대고는 단단히 팔짱까지 채우는 아라였다.
"개찰했으니 무임승차는 아니고, 문제는 행선지가 다르다는 건데.."
"뚫린 입이라고."
가뜩이나 풀이 죽은 그를 무참히 짓밟아댔다.
"안 걸렸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뭐?"
"기차를 잘못 탔다. 해서 비용을 지불하겠다 정정당당 말하려 했지. 유레일패스도 있으니. 근데 티켓 검사를 안 하잖아. 이실직고했으면 오는 내내 달달 볶였을 텐데. 차라리 가시방석 신세가 낫지."
"정정당당!! 뜻은 알고?"
"이렇게까지 화 낼, 그리고 핀잔 받을 일인가?"
"괘씸해서 그래요."
"응?"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에 또 인사,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건네었으니. 속으로 웃었을 거 아냐."
"플랫폼까지 갔다가 유턴한 거라고. 내내 오매불망하던 그 아시시가 나도 궁금했다니까."
흥흥- 대답 대신 아라는 성난 콧김을 내어 보냈고, 속시원함 보다는 오히려 부아가 치밀어 오른 그는 내내 마주했던 시선을 물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애써 붙잡았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있듯, 헛되이 불지 않은 바람이 열기를 조금 가져갔나 보다. 격양되었던 감정은 어느 틈에 조금 누그러졌고, 쏘아대던 시선 또한 부드러워졌다. 늘상은 아니지만 있을 법한 일, 세차게 쥐몰이를 했나 싶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또 괜한 열을 올렸구나. 생각이 여기에 닿자 아라는 바짝 오른 독기를 애써 눌렀다.
"행운이었다 칩시다. 이제부터는 불행의 연속일 테니."
"2차전인가?"
고심 끝에 한 말이 또.. 자책할 틈도 없이 아라는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옥토버페스트 기간 민휀에 갔던 선배 왈,, 숙소 구하느라 진땀 뺐던 기억뿐, 정작 맥주는 뒷전이었다고. 아시시는 대도시도 아니고, 숙박 시설도 다양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축일을 앞두고 있기에 신자와 관광객들이 한데 엉겨 숙소난은 불을 보듯 뻔하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필살기라도 되는 양 눈을 찡긋거리는 진중하지 못한 그의 사람됨에 또렷한 실주름을 미간에 새기며 아라는 못마땅해했다. 그 모습이 진호의 눈에 꽉 차게 들어왔나 보다. 그는 단번에 웃음을 지웠다.
"네잎클로버 잘 찾는 편이라."
그러고는 슬쩍 아라를 곁눈질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날이었으면 좋겠네요. 당신을 위해, 그보다 몇 곱절 더 나를 위해."
"그렇다면 버스 티켓을 사야 하는데. 한국어 안내가 적힌 가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나오는 카페, 여기서 왕복 티켓을 구입하면 되고, 역 밖으로 나가 좌회전을 하면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C호선 버스를 타고 여덟 정거장을 지나 s. francesco Assisi에서 내려 오른쪽에 보이는 큰 문 혹은 왼쪽길로 올라가면 된다는. 양 갈래 길에서의 선택은 조금 후에 하기로 하고,, 안 가고 뭐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의 도래를 몸소 알리는 개구리처럼 그의 음성은 기분 좋게 뛰어다녔다. 한껏 틔운 봄의 기운을 시샘한 꽃샘추위가 매섭게 할퀴고 간, 여린 가지 위 난도질당한 꽃망울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말간 그의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이완과 수축을 거듭한 탓에 조리개는 한층 생기를 머금었고, 그로 인해 짓이겨진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눈을 깜박여봐도 여전했고, 질끈 감아버린 어둠 안에서도 비틀거렸다. 순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낼 자신이 없어지자 더럭 겁이 났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래.'
침묵하던 것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일제히 봉기를 했고, 물살을 빠르게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안내를 했다. 깊고 가파른 회전 안에서 참새 하나 쫓지 못하는 허수아비처럼 아무렇게나 허우적대고 있었다. 실체가 없는 비웃는 소리가 왕왕 울려댔다.
'함부로 판단하지 마.'
악에 받친 말이 세차게 휘돌며 치솟았다. 무턱대고 도망갈 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는, 아직은 아니었다. 단지 아시시가 궁금하다? 그가 친 연막은 서툴기 이를 데 없었고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더러 있었다. 모른 척 덮기엔 넘겨온 페이지가 아까웠고, 이어질 내용들이 궁금했다. 결국,, 빤한 자신 대신 켜켜이 감싸고 있는 그를 엿보러 한 발자국 더 가보기로 했다. 마음을 정해서일까? 이상하리만치 편해졌다. 이내 흩어진 마음을 마저 쓸어 담았다.
"제 집 안방 같은 이 익숙함은 뭐지?"
"아니.. 이렇다 할 구경거리 하나 없는데 내동 창밖만 보길래, 계란도 사이다도 없지 해서 공부를 좀 했다는. 당신 역시 초행길, 거듭 말하지만 짐짝은 싫어서."
쭈뼛거리던 좀 전의 태도는 오간 데 없고, 그는 조목조목 말을 뱉어냈다.
"한댓잠을 은근히 바라는 거 아닌지. 말하지만,, 살갗에 엉기는 훈훈한 바람이지만, 밤이 되면 살을 에이는 무시무시한 추위로 바뀔 거라고.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그리 잔인한 성정은 아닐 텐데..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벌써 양 갈래 길에 도착했겠다."
끌낭의 손잡이를 크게 움직여 예열을 하며 보란 듯이 재촉을 해대는 진호였다. 밉고 달갑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움직여야만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심뽀 하고는."
입을 삐쭉하고는 아라의 끌낭을 툭- 치고 그는 앞서 나갔다. 속히 따르라는 무언의 몸짓처럼 말이다. 초행길인지라 수십 번도 더 돌려본 영상이었다. 플랫폼도, 의자도, 선로까지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낯설었다. 정작 생경스러워야 할 그의 모습이 외려 눈에 익었다. 해서 그 낯익음에 다가가려 아라는 보폭을 크게 잡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