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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Oct 04. 2024

잘 외우는 아이, 잘 못 외우는 아이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두 아들이 어릴 적, 그들의 암기력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차이를 알게 된 것은 영어 단어를 외울 때였다. 

하루는 영어학원에서 단어 시험을 보니까 외워야 한다고 큰 아들이 말했다. 단어 수는 100개 정도.
방에 들어가 30분쯤 되었을까, 단어 테스트를 해달라고 했다. 시험 보기 전 연습이었다. 오늘 처음 외웠다고 하는데, 초등학생이 30분에 100개를 외웠다는 말에 반신반의. 단어의 난이도도 초등학생에게 결코 쉬운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없어 큰 아들이 또 영어 단어 시험이 있다고 하길래, 단어 외우는 모습을 보려고 방에 들어가 보았다. 단어를 읽고 스펠링을 한 자 한 자 말하고 중국어 뜻을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쓰지 않냐고 했더니, 이렇게 구두로 읽으면 된다며, 그때도 100개를 30분 정도로 외워냈다.


둘째도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단어를 외우는데, 이 아이는 30개 정도 외우는 걸 버거워했다. 빨리 외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조르기에  외우는 법을 말했더니, 외워지지 않는다며 짜증을 냈다.



암기력은 집중력과도 어느 정도는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큰 애는 집중력이 높아, 엉덩이를 오래 붙여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작은 애는 시험 기간이 코 앞에 닥치지 않는 한 어려웠다. 작은 애는 영어 단어 외우는 건 힘들어하지만 암기 과목이라고 하는 역사, 사회 과목은 또 괜찮다. 아마 역사, 사회는 스토리화해서 기억하는 듯하다.




내 학생 중에도 유독 단어를 잘 외우는 학생이 있는데, 암기력이 좋으면 학교 공부에 편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암기력만으로 학업 성적을 좌우한다고 할 수 없다. 암기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해서 IQ가 낮은 것도 아니고, 암기력이 뛰어나다고 IQ가 반드시 높다고도 할 수 없다. 암기력은 학습에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일 테니까.




두 아들은 각자 지닌 소질과 재능이 달라 보인다. 물론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면이 더 많다. 지니고 태어난 능력을 갈고닦는 것도, 숨겨진 능력을 찾는 것도 아이 자신의 몫이다. 곁에서 누군가 조금이나마 갈고닦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건 행운이라 하겠다. 그게 부모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부모가 애써 한다고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자식이라 해도 나와 다른 영혼, 부모의 DNA를 다소 갖고 있다고 한들 나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큰 착각이라는 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뒤늦게 깨닫게 된다. 애써 도와주려는 것보다, 한 발치 떨어져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게 오히려 자식들에게 보탬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할까 고민할 시간 있으면 나 자신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요즈음 들어 부쩍 든다.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란 까닭도 있겠지만, 과거에 자식을 위해 했다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 보면,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하는 것들이 쌓여가면서 터득한 깨달음이다. 자식 앞을 걱정하기 보다 자신의 건강, 취미 등을 챙기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에서 이야기가 딴 데로 세어버린 것 같은데, 기억력이 좋다고 너무 기쁠 일도 아니고, 안 좋다고 그렇게 상심할 일도 아니다. 자신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 남과의 비교에서 평가하지 말고 오로지 나의 특징을 알고, 그 특징을 잘 살려나가는 것이 효율적이고 지혜로운 것 같다.


자랑할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기억력이 안 좋다. 젊었을 때부터 사람 이름, 숫자가 특히 안 외워진다. 매해 새로운 학생들을 접하고 새로운 이름들을, 그것도 중국어로 외우는 게 내겐 하나의 숙제이다. 갑자기 연도를 물어보면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얼마에 샀냐고 물어오면 대략적인 가격밖에 대답해 줄 수 없다. 


그래도 50 평생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무사히 살아갈 것이다. 부실한 기능, 소질에 집착하여 에너지 소모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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