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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게 제일 좋아

by 김추억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큰 소리로 나를 깨웠다.

학교에 잘 다녀왔다는 인사도 없이 엄마의 확답부터 구했다.

"엄마! 엄마! 엄마가 나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요? 엄마가 나한테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


순간 뭔가 모를 불안이 감지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밑밥을 깔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는 내게 딸아이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엄마가 그랬잖아요. 나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맞죠? 그쵸?"

"그랬지, 근데 뭐가 왜 또 무슨 일인데?"

엄마의 확답을 들은 아이는 그제야 환한 웃음이 되어 하고자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쵸? 하경이는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되지요? 엄마, 오늘 학교에서 작년에 배운 거 시험 봤거든요.

그런데 제 시험지에 비가 내려요! 빨간 비가 내려요. 아주 세차게 내려요. 그래도 제가 행복하니까 괜찮쵸?"

역시나 밑밥을 깐 게 맞았다. 딸아이에게 네가 행복하면 되었지, 그런데 나중에 공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 스트레스 받고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만을 띄어 주었다.

내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내가 공부머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컸다. 학원이나 과외, 학습지 같은 것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예습 복습도 없이 학업의 스트레스 없이 행복했다.

중2 때 잠깐의 가출사건 이후에 공부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공부를 좀 신경 써서 처음 해 봤는데 반에서 1등을 했다. 신기했다. 이 정도 노력으로 1등은 한 게 신기해서 작정하고 공부해 보니 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가출의 경력으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괴롭혔던 선생의 과목을 전교 1등으로 복수해 주니 그 선생은 나를 필요 이상으로 예뻐해 주기 시작했다. 가출의 공백 때문인지 수포자가 되어 수학은 따라가지 못했지만 다른 과목들은 거의 전교에서 1,2등을 했었던 것 같다.

공부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나서는 공부가 제일 쉬웠다. 공부비법을 물어오는 친구들에게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한다고 말하면 나에게 재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딸에게도 굳이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하게 된다. 필요성을 느끼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대책 없는 믿음이 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내 경험이 여전히 기준이 되어도 괜찮을까 싶지만 또 딸아이 공부에 신경 써 줄 만큼의 에너지도 많이 부족하다.

딸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한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 학원을 보내 달라고 조른 것을 일부러 1년을 기다리게 하고 여섯 살부터 다니게 했다. 이상한 엄마의 이상한 교육 철학이었다. 검도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피아노를 꾸준히 다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검도장에 보내주었다. 작년에 방과 후 수업으로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하길래 이제는 바로 신청을 해 주었다.

오늘은 그림과 무용을 배우고 싶다고 하길래 시간을 조정해 보자고 했다.

딸아이의 시험지에 빨간 비가 내려도 전혀 조급함이 없는 엄마와 여전히 행복하기만 딸을 세상은 어떻게 볼까. 걱정스럽고 한심한 눈빛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엊그제 학교에서 보내온 종이에 아이의 장래희망을 적어야 하는 칸이 있었다. 딸이 원하는 장래희망 칸과 부모가 원하는 장래희망 칸이 구분 지어 있었다. 부모가 원하는 장래희망 칸에 나는 시인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딸에게 "나중에 커서 뭐 될래?"라고 물어보았다.

"엄마, 나는 아직 꿈이 뭔지 몰라요, 그냥 아무것도 적지 마세요. 일단 건물주가 되긴 해야 해요. 그래야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니까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딸아이가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어디 그게 쉬운 일인지 살며 부딪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뾰족한 묘수라도 생길지 모를 일이다.

딸은 가방을 벗어 놓고 다시 나가야 한단다. 피아노 학원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놀기 위해서.

한마디 하고 나가는데 얼척이 없다.

"노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노는 시간이 너무 없어 큰일이네."

거의 놀기밖에 안 하면서 노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니 정말 빨간 비가 내리는 시험지가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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