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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현금생활

by 김추억

"하경아, 엄마 2천 원만 빌려주라. 현금으로 뭐 낼 거 있는데 현금이 없다."

딸아이는 나보다 현금이 많다.

나는 체크카드 달랑 하나 들고 다니다 보니 현금 구경하기가 힘들고 또 갈수록 현금을 취급 안 하는 매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딸아이가 2천 원을 무슨 작은 서랍에서 꺼내는데 지폐들이 너무 정갈해서 깜짝 놀랐다.

명절 때 어른들께 받은 용돈들이었다. 언제 이렇게 접어 놓았냐고 물어보니 동문서답을 한다. 접으면서 행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접어놓아야 쏙쏙 꺼내 쓰기가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5만 원권이랑 5천 원권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동전도 모으는데 500원짜리만 모으고 있었다. 딸아이는 숫자 5가 좋다고 했다.

요즘 우리 딸 세상을 누비며 산다.
명절 때 받은 용돈을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 맡기지 않는다.

다이소에 가서 온갖 실험도구를 사다 쟁긴다. 사실 실험도구가 아닌데 실험도구로 사용하니 실험도구가 되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요리가 나오기도 하고 돈이 아까운 이상한 발명품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딸아이가 자기 돈으로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을 크게 터치하지 않았는데 요즘 조금 염려스러워졌다.

다이소 앞에 있는 과일가게에서 거침없는 태도를 보일 때였다.

"엄마, 딸기랑 망고 사 가요."

"엄마 돈 놓고 왔어." (돈 놓고 왔단 건 거짓말이다.)​

"제가 사 줄게요."

딸아이는 과일 가게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나서는 좋은 딸기가 들어왔냐고 여쭤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딸기 제일 크고 좋은 거, 맛있는 딸기 먹고 싶어요."

사장님은 제일 알이 큰 딸기 바구니를 보여주며 그럼 이걸로 하라고, 원래는 얼마인데 얼마만 받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딸아이가 접힌 현금을 사장님께 건네면 사장님은 접힌 현금들을 펴신다.

딸기와 망고를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딸아이에게 한마디 했다.

"너 너무 씀씀이가 커지는 거 아니냐?"

"엄마, 있을 때 누려야 해요. 인생 뭐 있어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이에요."

나는 기가 차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얼마 전, 내 생일이었다. 딸아이가 생일선물로 라면 스프 같은 것을 하나 건넸다.

뜯어보니...

뜯어보니 현금이다.
선물보다는 현금이... 낫긴 하다마는...
편지? 도 고마웠다.
어젯밤 딸아이가 돈이 든 통을 보며 혼잣말하는 걸 들었다.

"빽빽했었는데... 조금 헐렁해졌네."

요즘 우리 딸, 있을 때 누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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