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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 김에 뉴질랜드 Mar 01. 2024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곳, 나의 집

누군가를 향한 친절함은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냐 넌!! 왜 이곳에 사는 거냐!! 자세히 보면 왼쪽 레몬나무 아래 누워있는 생명체가 보일거다.


타우랑가에서 두 번 이사를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벽돌로 지어진 집이라 겨울이 따습다. 마당도 초록 초록한 잔디가 깔린 집이다. 앞집에는 나의 딸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남매가 살고 있고, 그 집 둘째는 친구다. 나는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산다. 오다가다 마주치면 어김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누구가 먼저랄것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내가 처음 이곳을 도착했을 때는 영어를 잘 알아듣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을 못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언어는 뭐다? 자신감! 마주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알아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언제부터인가 영어가 귓구멍으로 스며들었달까? 귓구멍을 스치고 지나가던 영어가 고막에 딱딱 박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귀가 뚫린다는 걸까? 

대각선에 살고 계시는 노부부는 마주칠 때면 항상 이야기를 하는 주제가 있다. "요즘 뉴질랜드에 사는 건 어때? 살만해? 이곳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랐어. 이곳은 정확하게 잘 알아. 너 도움이 필요해?" 앞집의 벨은 "우리 집에 수영장이 있어. 한번 놀러 와. 우리는 이웃이잖아." 남매를 키우는 또 다른 남매 집은 "너희 가족도 동물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일을 하고 있어. 평일 낮에는 집에 없을 때가 종종 있어. 알지? 근데 주말에는 집에 있으니까 너 시간 날 때 그냥 들려줘. 괜찮아!" 내가 사는 이곳에는 아시아인이 나의 가족뿐이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나는 이토록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던가>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 생활하며 시작된 물음이다. 아침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맥심 믹스커피 두 봉지를 따숩게 타서 마시면서 또 생각하게 된다. 남편과 공원 산책을 하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카페에 둘이 앉아 브런치를 먹으면서 이 물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물론 단점들도 있다.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불가능하지 않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함은 넘쳐난다. 이것이 바로 낯선 문화의 뉴질랜드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적은 이유이다. 내가 다가가 손을 내밀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웃이 있기에 이곳에서 사는 삶이 결코 힘들지만은 않다. 

어제는 딸의 친구가 놀러 왔다. 나의 집에 처음 놀러 온 친구다. 딸의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하교 후 만난 나의 딸 친구는 "한국인 친구는 처음이에요. 기뻐요. 아세요? 저에게도 이제 한국인 친구가 생겼어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저도 한국인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 말이에요."

나의 눈을 쳐다보며 하는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무릎을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고 귀를 기울여 순수함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의 스승이다. 그 어린 친구는 인생의 여행길에서 만난 또 다른 스승이다. 

집에 온 나의 딸과 친구는 한국의 과자와 한국어가 쓰여 있는 스티커와 동화책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나의 딸 친구 "딜런". 딜런은 한국의 문화를 언어를 알고 싶어 했다. 벽을 두지 않고 한국의 과자와 음식을 먹으며 한국에 대해 쉴세 없이 물음을 던졌고, 나의 딸은 대답을 해주었다. 이 둘의 모습을 보며 외교관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시간 30분 정도 놀았을까? 딜런의 엄마가 데리러 왔다. 돌아가는 길에 딜런의 엄마는 딜런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딜런. 너의 친구가 완벽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너는 항상 도와주어야 해. 친구가 틀린 문장을 이야기할 때, 올바른 문장을 알려 줘. 너의 말을 이해를 못 한다면 친구가 이해할 수 있게 더 쉽게 알려줘. 쓰는 건 못해. 너도 많이 틀리잖아. 너도 쓰는 연습을 좀 하는 건 어떨까? 어쨌든 책을 읽을 때 친구가 못 읽는 단어가 있다면 같이 읽어줘. 알겠니?"


<나의 딸에게 친구를 도와 주라는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던가.>


한국에서 나는 딸에게 어떤 말을 많이 했었나를 생각했다.

"친구가 시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해? 친구가 니 의자에 발을 얹히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해? 친구가 때리면 너는?" 주로 이런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한국의 교육이 틀리고 뉴질랜드의 교육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만, 나는 딸에게 저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없었나...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의 여유도 생각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일까. 교육은 정답이 없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른 교육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방향. 그 방향은 무엇일까.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통해 양육의 방향에 대해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꺼지지 않는 마음의 빛으로 밝게 빛나는 아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집에는 고양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남은 집 앞이었다.

이사를 오고 얼마 뒤, 나는 딸에게 현관 앞의 신발 정리를 부탁했다. 신발 정리를 하던 딸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엄마! 빨리 와봐. 누가 찾아왔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방방 뛰며 빨리 오라는 딸의 부름에 달려갔더니 찾아온 게 사람이 아니네? 고양이네? 그런데 누구?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한데 고양이를 내다 버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 좋아할 것 같았는데? 사람 사는 곳이라 버려지는 동물도 있긴 하겠지. 어쨌든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갔고 그날 집 앞에서 고양이와 한참을 놀았다. 때마침 앞집 할머니가 나와서 가족이 있는 고양이란다. 이웃집 고양이다. 

이곳은 고양이도 자유롭게 돌아다닌단다. 유기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이상스러운 문이 있다. 바로 이문이구나. 이 문을 통해 자유롭게 돌아다닌 거였다. 그 뒤로 이 고양이는 수시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누구가 쳐다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 고양이다.

비가 오나 안 오나 항상 온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 젖은 털을 닦아준다. 집으로 들이고 싶지만 나는 렌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계약에 동물은 키울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혹시나 해서 주인에게 물었지만 주인은 안된다고 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마당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공부를 할 때면 뒤통수가 뜨겁다. 또 쳐다보면 마당에서 가만히 앉아 집안을 보고 있다.

두 사진이 같은 날 같지만 다른 날이다. 한동안은 저렇게 한참을 앉아 집안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항상 있다. 집에는 안 가니? 부모님이 찾진 않고?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는데도 옆통수가 뜨거운 게 느껴진다. 옆을 돌아보면 또다. 또 있다.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 너의 생각을!!"


언제나 집안을 보고 있다. 자꾸 오다 보니 물을 주게 되고, 그리고 사료와 간식을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가족이 있으니까 간식만 조금씩 주었다.

그러다가 또 사료를 구매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와 나의 딸은 뉴질랜드 캣맘이 되었다.

사료와 물을 주게 되면서 본격적인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언제나 마당에서 생활을 한다. 마당에서 밥을 먹고 물을 먹고, 테이블 위, 테이블 아래, 의자에 누워 잠을 자기도 하다 바닥에 누워 자기도 한다.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여. 그냥 내 집 같은 편안함으로 지내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잔다. 하루 종일 잔다. 이웃이 찾지는 않을까? 이쯤 되면 고양이가 집에 안 오면 걱정을 해야 하는데. 집 앞을 지나갈 때 마주치고, 학교에서 아이들 픽업 때문에 가끔 마주친다. 고양이를 찾는 기색은 안 보여. 신기할 따름이다. 가고 싶을 때 돌아 가겠지. 

이 정도 되면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다.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뉴질랜드니까 영어 이름을 지어줘야 하나? 한국식으로 고영희, 고영숙 뭐 이런 이름을 지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오늘은 하교 후 버스를 타고 딸과 함께 고양이 집을 사러 가기로 했다. 내 고양이도 아닌데. 나도 남의 집을 빌려 사는 처지다. 그래서 집에 들일 수가 없다. 마당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는 비가 오면 비를 피하고 뜨거운 낮에는 태양을 피할 집이 필요하다. 어쩌다 보니 가족이다. 마당에 고양이가 없는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마당에 누워 있고 창문으로 집안을 보고 있는 일상. 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다.

어찌보면 한국 집에 있는 고양이를 그리워하는 나의 딸에게는 잘 된 일이다.

마음을 나눌 동물 친구와 친절한 이웃이 있다. 이토록 완벽한 집이라니.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면 같이 놀 동물 친구가 있다는 것! 나의 딸에게는 소소한 행복이다.

지금 창밖을 보니 화단 한가운데 앉아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다. 


"너 지금 뭐 하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그곳은 바로 나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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