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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Aug 11. 2023

승마교본 5

   “왜 미디어나 여러 곳에서 보면, 말 뒤에 서지 말라고 하잖아요. 뒷발로 찬다고. 그건 만들어진 이미지인가요?”

   어느 날 밥을 먹다 당신이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한다.

   “물론 말의 구조상 뒤에 있으면 뒷발에 차일 수 있겠죠.”

   “단지 그뿐인가요?”

   “예, 일부러 차진 않아요. 놀랐거나 피해야 하거나 등 어떤 이유로 실수는 하겠죠. 아, 그런데 말들끼린 뒷발질해요. 다만 사람을 차진 않아요. 자라면서 그렇게 훈련합니다.”

   어떤 훈련을 통해야 그렇게 될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까.

   당신은 더욱 말의 입장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이삼일이 지났다. 나는 당신을 부른다. 손에는 마방굴레를 들고 있다. 당신이 보는 앞에서 달그림자에게 굴레를 씌운다. 나는 굴레에 리드줄을 걸며 말한다.

   “이 리드줄은 라스깡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러 가지로 말에게 지시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지시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만다. 그것은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졌기에. 굴레를 씌우고 리드줄을 끌자 달그림자는 자연스럽게 내 보폭에 맞춰 따라온다. 당신은 그런 나를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것은 당신의 미덕이다. 나는 달그림자를 끌고 벌판을 크게 돌기 시작한다. 당신은 곁에서 함께 걷는다. 그 뒤를 새벽안개와 그 자마가 따르고 있다. 우리는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따뜻한 햇볕 아래서 걷는다. 반쯤 걸었을 때 나는 리드줄을 당신에게 넘긴다. 이것은 명령을 듣게 하는 마법의 줄이다. 우리는 초원을 크게 돌아 다시 집 앞에 선다. 나는 달그림자에게 씌운 마방굴레를 벗긴다.

   “말을 끌어 보니 어때요?”

   당신의 표정은 미묘하다.

   “신기해요. 이렇게 착한 아이가 되다니. 마치 다른 말 같았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굴레를 쓰면 다른 말이 되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사람이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처럼. 아니 굴레는 그보다 더한 입장의 강요다.

   “이제 굴레를 씌우는 법을 배울 거예요.”

   나는 당신 앞에서 시범을 보인다. 아까는 대충 굴레를 가져가 씌웠지만, 지금은 천천히 과정을 보여준다. 왼팔로 목을 감싸 안는다.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돌며 오른쪽 어깨가 달그림자의 턱을 받친다. 도는 과정에서 오른 손에 들고 있던 굴레는 왼손으로 옮겨 잡는다.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안으며 살짝 당긴다. 달그림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그 순간 왼손에 있던 굴레를 얼굴로 가져가며 오른손으로 굴레 이마 부분을 잡아 씌운다. 마지막으로 목을 쓰다듬는다.

   “보셨죠?”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이 어렵습니다. 한 번만 하고 나면 어려운 건 아니에요.”

   당신은 굴레를 들고 달그림자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다. 달그림자는 당신을 경계한다. 굴레를 들고 있는 당신을 호락호락 따르진 않을 것이다. 도망가진 않지만 머리를 높게 쳐들고 내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당신에게서 풍기는 굴레를 씌워야겠다는 강한 의도는 그 누구보다 달그림자가 크게 느낀다. 달그림자에게 당신은 조금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되지 못했다. 당신은 결국 달그림자의 머리를 낮추는 것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신과 달그림자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나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당신은 말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주인이 되고 싶어요?”

   당신은 잠시 고민한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현실적으로는 둘 다 어려울 것 같지만요.”

나는 웃는다. 현실적으로는 주인이 되는 것은 쉬운 길이고, 친구가 되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친구가 재갈을 물리고 억지로 등에 타려고 할까. 물론 승마라는 것이 이런 친구나 주인이라는 이분법적인 단어로 정의될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굴레를 넘겨받고 다시 달그림자 옆에 선다.

   “이미 이 아이들은 교육이 된 아이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평등한 관계라면 이들은 과연 사람을 태울까요? 이건 답이 아니라 질문의 시작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중요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 질문의 공백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먼 날의 일은 아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할 건지 확실하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어요. 내가 지금 여기에 있고 무엇을 할 거야, 라고 알려주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동작을 따라오게 됩니다. 어차피 힘으로는 이길 수 없거든요.”

   그러자 당신이 묻는다.

   “친밀도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않나요?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당연한 질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물론이죠. 아마 저는 적어도 여기 있는 녀석들에게는 딱히 당신에게 시범 보이는 것처럼 하지 않고 굴레를 대충 머리에 가져다 대기만 해도 알아서 쓸 겁니다. 하지만 동작을 연습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개체에게만 사용하려는 건 아닙니다. 어떤 말에게도 그 말이 굴레를 쓰는 것이 훈련된 말이라면 씌울 수 있어야 하는 거죠.”

   당신은 머리를 끄덕인다.

   나는 리드줄을 달그림자의 목 위로 걸친다. 

   “잘 보세요. 이 행동은 올가미랑 비슷한 거예요. 너는 이제 묶였고 도망갈 수 없어, 라는 의미죠. 하지만 이 행동은 루틴은 될 수 있어도 필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후의 동작은 조금 전과 같다. 다른 것은 고삐를 목에 걸치고 있다는 것. 걸친 줄을 묶인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 도망칠 수 없다는 체념. 굴레를 씌우고 마지막으로 목을 쓰다듬는다.

   “어쩌면 목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당신은 다가와 달그림자의 목을 쓰다듬어 준다. 그날 당신은 굴레를 씌울 수 있게 되었다. 굴레를 쓰자 당신은 말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변한 것을 느낀다. 당신은 혼자서 달그림자를 인솔해 산책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새벽안개와 자마도 줄지어 따랐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당신에게 달그림자가 아닌 새벽안개로 말들을 인솔하게 한다. 줄은 처음에 어수선했지만 날이 갈수록 정돈된다. 달그림자가 당신을 더 높은 서열로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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