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세상과 인사도 잠시
첫째가 1.8 kg 둘째가 1.5kg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입원해야 한다는 것.
작은 아기들을 인큐베이터로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루에 2~3번 면회가 가능했고 일주일 후 엄마는 퇴원 한 후
아빠는 퇴근하면 병원에 들러 아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간호 선생님이 오늘은 우유를 잘 먹고 몸무게가 조금 늘었단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으며
어떤 날은 우유를 잘 안 먹고 몸무게가 빠졌단 이야기를 들을 때면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둘째 아이 체중이 최하 650g 빠져서 병원에서 모두 초긴장 상태.
병원 선생님들의 보살핌으로 다행히 몸무게는 조금씩 늘었지만
위기는 비껴가지 않았다.
한 달 될 무렵,
밤에 도저히 안 되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병원의 전화.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병원에 갔을 때
50g 늘었다며 더 지켜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다시 몸무게는 조금씩 늘어나고
첫째는 2.0kg 둘째는 1.8kg 으로 두 달 만에 퇴원해
드디어 집으로 와 우리 가족은 4명의 완전체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인큐베이터 온도와 비슷한 25 ~ 26도를 유지하며
아빠가 출근하면 한 명은 무릎에 눕혀서 우유를 먹이고
한 명은 베개에 눕혀서 우유를 먹였다.
우유를 먹이고 달래고 트림 시키고 겨우 재우면
한 명이 울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니, 스테레오로 울지 않아야 한시름 놓는 셈.
잠이 들면 빨래, 청소,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기저귀 빨래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당시엔 천 기저귀를 사용해서
쌍둥이라 하루 기저귀 양도 50개 정도..
가장 힘들었던 걸 꼽으라면 뜬 눈으로 밤새우기.
쌍둥이 100일까지 하루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서
새벽에 우유를 먹이다 자칫 졸기라도 하면
아이들 얼굴에 우유로 지도를 그린 날도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잠을 못 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0일쯤에 7~8시에 자고 새벽 4~5시에 일어나는 게
일상이 되고 울지 않고 자서 효녀라 불렀다.
아이들 팔과 다리에 포동포동 살도 찌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뒤집기를 할 만큼 힘이 좋아지고
쿠션에 올려 두면 아래로 내려오기도 하고 가만히 누워 있다
몸에 힘주고 넘어가려 할 때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주면
잽싸게 넘어간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동인지....
이유식을 먹이며 분유를 간식처럼 먹였는데
매일 다르게 야채죽, 새우죽, 소고기 죽으로 이유식을 만들었다.
신기한 것은 이유식 먹일 때 한 명은 기다렸는데
그때만큼은 울지 않고 기다려 주어 기특하고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