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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씨앗

by 진은정

초등학교. 그곳은 내가 긍정적인 성향이 될 수 있도록

긍정의 씨앗을 심어 준 출발점.

나보다 장애가 심한 같은 반 친구들과 지내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도 함께 자랐다.

삶을 돌아볼 때마다, 이 생각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엄마가 우리를 깨우는 소리와 함께 칙칙 압력밥솥 소리도 들린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엄마 앞으로 다가가면

엄마가 옷 입는 걸 도와준다.

윗도리를 입으면 "팔을 쭉 펴야지, 팔을 펴” 라고 말하며

바지를 입으면 "다리에 힘을 빼” 라고 엄마는 말한다.

장애 특성상 강직이 있기 때문에 옷을 입을 때나

차에 앉고 내릴 때 자주 하는 엄마 아빠의 말.

다음 순서는 엄마의 기술이 필요한 양갈래머리 땋기.

쌍둥이라 양갈래머리 땋는데 30분은 걸리며

아침밥을 먹고 차로 등교하는 우리만의 등굣길 코스는

연세대 북문에서 시작된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꽃, 벚꽃으로 화려한 군무가 펼쳐지고

가을에는 노랗게 빨갛게 물든 은행잎과 단풍잎으로

겨울에는 눈꽃으로 가득한 설경으로

사계절의 매력을 선사해 주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지나 도착한 곳은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병원 재활병원 3층에 유치부와 초등학교가 있었다.

연세재활학교, 그 당시에 지체장애 특수학교로 알려졌고

한 반에 10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6학년까지 함께 공부를

하며 지내다 보니 가족이나 다름이 없는 사이.


우리 반은 은영이와 나, 일범, 창걸, 한주, 흥범,

종헌, 인기, 민경, 대열, 유진 11명의 친구들이 한 반인데

지체장애뿐만 아니라 중복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은영이와 나는 소통이 되는 흥범이, 일범이, 창걸이와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흥범이는 뇌 병변 장애로 손과 발의 장애와 언어장애가 있었지만

무척 똑똑해서 웬만한 수학 문제도 술술 잘 풀었으며

제일 공부도 잘했다.

언어 장애가 있어 입 모양으로 천천히 말하거나

손으로 글씨를 적어가며 대화했는데

간혹 선생님이나 부모님들께서 흥범이의 말을 못 알아들으시면

내가 흥범이의 입 모양과 손으로 쓰는 글씨를 맞춰 가며

흥범이의 말을 대신 전달해 주었다.


부모님들께서는 흥범이의 말을 전달하는 내가 신기한 듯이

"어머, 쟤네 좀 봐, 기막히게 알아들어”

"은정이 넌 어떻게 알아 듣니? 신기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재활 학교의 점심시간은 다른 학교보다 분주하다.

장애 정도에 따라 식사 방식이 달라 자원봉사자분의 도움이나

부모님들의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많은데

반찬 하나라도 혼자 먹는 것에 성공하면

부모님들께서 뛸 듯이 기뻐하셨다.


한달에 한 번 정도 나와 일범이는

점심을 빛의 속도로 빨리 먹은 후에 엘리베이터로 다른 층에 내려서

경사로를 지나 또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지나 병원 안에 있는 작은 선물가게에 자주 놀러 다녔다.

선물가게에서 친구들 생일선물이나 선생님 선물을 사서 반으로

돌아오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나의 즐거움 중 하나.

은영이는 창걸이와 자주 다녔는데

점심시간에 나간 은영이와 창걸이가 오지 않아서

엄마가 한참을 찾으러 다닌 끝에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찾았다.

도보로는 꽤 되는 거리를 둘이서 내려가서는

언덕길을 올라오지 못해 정문에 서 있었던 것.

바로 옆에 차도가 있어 위험하니 너희끼리 오지 말라며

엄마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에 물리치료와 작업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체력 고갈로 엄마도 우리도 거의 대화가 없다.


다가구 주택에 살던 때라 골목으로 들어서 우리 집 대문 가까이에

차를 세우면 그 시간쯤 할머니 서너 분이 골목에 나와 앉아 계신다.

엄마가 우리를 휠체어에 태울 때 마다

할머니들께서는 한마디씩 하신다.


"아이고... 쯧쯧쯧...”

"둘이나... 어쩔꼬..”

"다른 형제들은 없어요?”


엄마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른 집으로 들어온다.

우리를 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세가지 중 한마디는 꼭 하셨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은 자주 있던 어느 날,

그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엄마가 속이 많이 상해

아빠에게 전화했다.

애들 데리고 오는데 할머니들이 쭉 앉아서

사람 속 모르는 소리 한다며 발을 구르며 눈물을 흘렸고

아빠는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뭘 그러냐는 말로 엄마를 달랬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겪을수록 엄마는

우리를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항상 예의를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상적인 부분에서 잔소리가 조금 많은 것,

돌이켜 보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썼다면 좋았을 텐데

채찍을 더 많이 한 편이긴 하다.

나로 인해 속상해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 앞에서 울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힘들고 아픈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고

엄마 걱정이 되어서 나라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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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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