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거슬러 올라 농부가 조상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 근대이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였고, 전 세계 인구의 70%와 아시아 인구의 90%가 쌀을 주식으로 한다고 한다. 농작물 중에서도 서양의 밀과 동양의 벼는 식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비록 벼가 중국에서 전해온 것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청주 소로리의 토층에서 출토된 볍씨는 1만 5천 년 전 구석기시대의 유물로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았다. 중국에서도 5천 년 전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유물밖에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는 것을 보면 실로 우리 벼농사의 유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Ⅰ풍년을 축하하며 즐기다Ⅰ
일찍이 종묘사직의 사직(社稷)은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 사(社)는 땅을 주관하고 직(稷)은 곡식을 주관하고 있는 만큼 한 나라의 조상을 기리는 것과 먹거리를 위한 농사에 관한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농사일 중에 벼농사라는 것은 본디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어서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이 가뭄에 바싹 타 들어가는 벼에 물은 대지 못하고 머리만 긁어대야 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했듯 벼농사는 천수답에 물을 대는 것부터 보통일이 아니었다.
가뭄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물난리라도 나면 이번에는 힘껏 지어놓은 농사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니 중국의 영향력 있는 작가 쑤퉁은 그의 장편소설 <쌀>에서 주인공 우릉의 대화를 통한 쌀농사의 어려움을 묘사했다. "추수하기 바로 전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모든 게 사라졌어요. 그것들은 일 년 내내 애쓴 사람들의 피와 땀이었는데, 죄다 홍수에 떠밀려가버려 쌀 한 톨도 구하지 못했지요."(쌀, 김은신 옮김, 도서출판 아고라)
어찌 되었든 비라도 내려야 비로소 벼는 자랄 수 있는 것이니 <<시경>><소아> 신남산(信南山)에 하늘에서 내려주는 고마운 비가 내려 비로소 작물이 자라는 것이 가능하여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는 시가 전한다.
하늘에 구름 덮이니 눈비 내리네 / 가랑비 내려 넉넉히 적셔주네 / 밭마다 흠뻑 젖어 백곡이 자라네
*신남산:길게 뻗은 남산
예로부터 주요한 곡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벼와 조와 기장과 콩, 그리고 보리 같은 것이니 대저 벼농사는 물이 기본적으로 많이 필요하여 관계시설이 잘 갖추어져야 가능하여 혼자서는 다 할 수 없고 촌락을 이루고 마을 사람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물이었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비단 생계수단의 농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가 싹트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농사의 풍흉은 그야말로 죽고 사는 문제여서 흉년이면 부지기수로 기아가 발생하여 죽어나가는 한편, 풍년이라도 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쏘냐 서로 좋아하고 권농한 것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한 것이어서 시경에도 풍년의 기쁨을 전한 시가 몇 수 전한다.
<<시경>> <소아> 보전(甫田)에 벼가 풍년이 되어 기뻐 온 가족과 같이 기뻐하고 부지런한 농부들을 칭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증손이 찾아왔네 처자와 같이 / 남쪽 밭에 새참 내와 권농관도 기뻐한다 / 좌우음식 집어다가 어떤가 맛을 보네 / 긴 밭이랑에 벼이삭 넘쳐나니 / 결국에는 풍성하구나 / 증손자 화내어 무엇하리 / 농부들이 바삐 음직이는데
*보전:큰 밭
또 풍년이 들면 마음도 편안할 뿐 아니라 너그러워지기도 해서 <<시경>> <소아> 대전(大田)에 우리의 풍습과도 같은 풍년의 여유가 엿보인다. 작황이 좋으면 농부들도 벼 이삭이나 고구마와 감자도 어느 정도 남겨두어 어려운 이웃을 배려한 아름다운 풍습이 있는 것이다
저곳에 베지 않은 곡식 있고 / 이곳에는 걷지 않은 볏단이 있네 / 저기엔 남긴 볏단 있고 / 여기엔 흘린 이삭이 있으니 / 과부들의 몫이라네
*대전:큰 밭
풍년이 되고 보니 당연 농사일에 정통하고 비법을 자손들에게 전수해 준 노인을 더욱 공경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흥을 돋우는 쌀로 만든 술과 함께 축제는 절로 흥겨워지는 것이니 <<시경>> <빈풍> 칠월(七月)은 벼를 벨 때의 축제와 같은 기분으로 술과 함께 노인을 공경하는 장면을 노래했다.
팔월이면 대추 털고 시월이면 벼 거두네 / 이것으로 봄 술 담가 노인들 장수비네 // 우리네 농부들은 이렇게 살아가네.
Ⅰ농민의 고초 / 가렴주구 Ⅰ
18c 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쌀을 밥상에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종시대의 전답의 비율은 72: 28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밭이 많았다. 백성들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쌀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양반 이상에게나 가능했으니 <<시경>> <위풍>벌단(伐檀)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쌀이나 축내고 놀이에만 열중하는 군자들을 통쾌하게 나무란다.
퍽퍽 박달나무 베어 황하 물가에 쌓아 / 황하는 말고 물은 맑고 잔물결 인다 / 심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농사도 안 짓거늘 어찌 삼백석 곡식을 탐하는가 / 사냥은 마다하고 뜰에 매단 담비는 탐하는구나 / 군자여 일 않고는 밥 없는 법일쎄
*벌단:박달나무 베어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언제나 벼는 익어간다. 쌀 한 톨이라도 어느 시대나 귀한 시절이 아닌 때가 없었으니 풍족한 오늘날조차 밥공기에 쌀 한 톨이라도 남기면 왠지 죄책감이 드는 것은 다 이러한 사유일 것이다. 김유정의 <만무방>은 일제강점기하의 농민의 피폐한 삶을 응칠과 응오 형제의 척박한 삶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벼를 심어 놓고도 지주의 논을 일구면서 생긴 빚과 농사비용을 제하면 남을 것도 없는 상황이 라 작가는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옛, 옛, 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이라고 써 내려간다.
*장리쌀:장리로빌려주거나또는장리로갚기로 하고 꾸는쌀.
*색초:잡초를 제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Ⅰ논, 공존의 미Ⅰ
적절한 물에 파릇한 벼가 자라기 시작하면 논은 더 이상 인간의 먹거리로서만의 장소가 아니다. 논에는 물방개가 살고 개구리며 잠자리며 벼메뚜기와 우렁이등 각종 생물의 생활터전이자 숲이다. 논은 수원인 댐의 역할과 식량의 급원지로서 그리고 각종 철새의 이동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멸종위기종 등 동물의 서식처가 되어 주는 생물다양성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벼가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면 겁 많은 희귀 새 뜸부기도 벼에 몸을 숨기고 먹이 활동을 한다. 산에 사는 꿩도 이때라 날아들고 백로며 저어새며 왜가리도 물 댄 논은 이들의 먹거리가 풍부한 안식처가 된다. 메뚜기는 벼를 쓸고 백로 새끼가 벼 위에 고개를 쑥 내밀다 아차하고 다시 감추는 장면은 실로 논의 생태계가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뜸부기가 논 사이를 걷고 있다(김현미 숲해설가,좌). 좌상부터 시계뱡향 큰주홍부전나비, 남방부전나비, 매미, 메뚜기(중). 왼쪽 백로, 우상 흰뺨검둥오리 유조, 우하 꿩(우)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논은 습지로서의 기능도 독특히 한다. 람사르협약의 습지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논도 습지로 되어 있고 습지는 경제적 · 문화적 · 과학적 · 여가적으로 큰 가치를 가진 자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이때 논은 광합성을 하는 장소 등 생태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논은 또한 경제적으로는 우리의 주식에 해당하는 쌀을 생산하는 곳이며 문화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인 두레와 논 문화에 대한 전통 민속놀이 등 우리의 생활과 정서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민속놀이 중의 하나인 줄다리는 짚단으로 가닥줄을 꼬아 여러 가닥의 줄을 다시 묶어 거대한 밧줄을 만들어 사용하는 놀이다. 장월대보름의 횃불놀이 또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해진 민속놀이다. 한편, 석전이라는 놀이는 두 마을의 양편이 서로 돌팔매질을 겨루는 위험한 놀이 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하든 승리해야만이 풍년이 든다는 동기가 있는 것이어서 물러 설 수 없는 한판의 승부였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비교적 가난한 마을이었다. 길과 몇 마지기의 논 건너편에는 2층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몇 줄 늘어서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상상도 못 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와 그쪽 아이들이 서로 위험한 돌팔매질을 하며 놀이 아닌 놀이를 한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행위였는데 혹시 그 행위가 농본사회에 기인한 놀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 아닌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는 건 무리일까?
l 한국의 색 l
필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색으로 가을 벌판을 누렇게 물들이는 벼의 황금색을 꼽고 싶다. 주요한 식량의 공급처로서의 기능에 더하여 아름다운 색조로 온 국토에 발현하는 황금벌판은 감명(感銘)의 파도로 밀려와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새겨놓는다. 노랗게 익은 벌판은 점차 누런색깔로 변하고 시간이 더함에 따라 바야흐로 황금벌판의 클라이맥스요 대미인 자줏빛 기운으로 벌판을 장식하는 것이다. 벌판 위에 솟은 달빛에 주눅 들랴 석양의 붉은 노을에 뒤질쏘냐 벌판의 황금색이 현란하도록 아름답다.
l 아름다운 벼꽃 l
벼꽃은 수술6개(사진의 흰 부분)와 암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꽃은 수술 및의 씨방 위에 피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벼를 쌀로만 생각한 나머지 벼도 꽃을 피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팔월이 다 갈 무렵 벼의 알을 맺은 이삭이 줄기를 타고 잎을 가르며 얼굴을 내민다. 이삭에서는 여섯 개의 흰색 수술이 나오고 암술은 이삭의 밑부분에 있어 눈으로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어느 날 식물의 이해 강의 시간에 우연히 벼 꽃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강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꽃의 아름움을 어디서 오는 걸까?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꽃은 모습이나 색깔 그리고 크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꽃이 갖는 여러 가지 가치를 포함한 종합적인 판단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작고 흰 꽃에서 인류를 먹여 살리고 풍성한 문화를 창조한 벼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은 눈에도 안 보이는 원자로 되어있고 원자들이 모여 큰 우주를 이루었듯 작은 꽃일수록 머나먼 우주로 생각은 확장되고 세상의 신비함은 더욱 깊이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