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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27. 2021

새벽, 산의 품에 안기다.

운동/ 러닝 이야기

해발 474m의 타포차우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사이판 시내


새벽 산길을 달리는 거북 맘



어둠이 가라앉은 새벽의 거리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흐른다.

다시는 빛을 볼 수 없을 것처럼

거대한 암흑이 세상을 짓누르고 있다.


저 멀리, 무례한 발소리 하나가 엄숙한 새벽의 모퉁이를 기어오른다.

둥지 속 새들도 잠든 고요한 평화를 흔들어 깨우며

새벽의 침입자는 거친 숨을 도로 곳곳에 흩뿌린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깜깜한 오르막은 이제 조용히 산길을 내어주고 멀어진다.

칠흑같이 깊은 동굴 속으로 한 발 다가서자

세상 누구의 접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웅장하고 근엄한 산속의 어둠이 빗장을 걸어 잠근다.


괘씸하다는 듯

뼛속으로 스미는 차가운 비를 뿌린다.

축축이 젖은 침입자의 몸이 가혹한 바람에 위태롭게 휘청인다.

기세 좋게 오르던 발길이 주춤하는가 싶더니 감히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주저한다.


단잠에 빠진 어둠 속 정령들의 침묵 속에

새벽하늘이 조금씩 문을 열자

이제 침입자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점점 더 가빠지는 숨소리에 부지런한 산속의 지저귐도 분주해진다.


이제 하늘이 열린다.

산속의 어둠도 배시시 웃으며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은 새벽 이슬이

새초롬하게 반짝일 때쯤

침입자는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진다.

마침내 깊고 짙푸른 가슴에 안긴 침입자의 고단한 미소가 바람결에 날려간다.


새벽, 산의 품에 안겨 눈물을 훔친다.




"아니, 그 새벽에 혼자 산길을 뛰겠다고? 진짜 미쳤구먼."


Run Saipan이라는 러닝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버츄얼 러닝 이벤트가

이번엔 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가는 미션이다.


Thanksgiving Day를 맞아 'Turkey Trots'이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이번 이벤트는

행사 첫날인 땡스 기빙 데이 당일날 아침에는 이미 3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산을 올랐고

행사가 마감되는 이번 주 토요일 정오까지 각자 편한 시간에 맞춰 목적지까지 도착한 후에

인증샷과 함께 자신의 러닝 결과를 등록하면 되는 방식이다.


하필 어두운 새벽 시간에 혼자 뛰는 걸 선호하는 마누라 덕분에

근심과 걱정이 한가득인 남편이

기어이 토요일 새벽 산길 러닝에 동참한다.

그렇다고 같이 뛰는 건 아니고

차로 따라오면서 동영상 촬영도 하고 사진도 찍어 주겠단다.

참으로 속정 깊은 양반이다.


중간중간 차를 세워두고 헉헉 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내 모습을 촬영하는 남편이

처음엔 고맙다가 너무 자주 찍어대니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 이제 그만 찍으라고!"


Mount Tapochau는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정상에 오르면 사이판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런 이유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곳이 중요한 격전지이기도 했었다.

수풀 사이로 몸을 사린 일본군의 대포가 산 정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이판 섬으로 상륙하는 미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모습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전쟁 유적지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상징적인 곳이다

산 정상에 예수님상이 있어서, 매년 부활절 때마다 원주민 차모로인들이

이곳까지 걸어 올라와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산 아래 도로에서부터 뛰어 올라와야 하는 이 코스는 만만치가 않다.

당최 평지가 없고 계속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인 데다가 도로가 끝나고 시작되는 산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닌, 크고 작은 돌멩이가 굴러다니고

울퉁불퉁 고르지 않은 비포장길 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 그래도 힘든 새벽 산길에 웬 강풍과 비가 그리 방해를 하는지...


험한 오르막 산길과 악천후 속에서도 죽기 살기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면서

기어이 산 정상에 도착하는 나를 맞이하는 남편의 표정이 재미있다.

'내 우리 마누라가 독한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진짜 독하네 저 여자.'

이런 생각이 남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도 해냈다.

이 기분을 충분히 글로써 표현해낼 재주가 없는 것이 안타깝고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이틀 전에 코로나 부스터 샷 맞았었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어지간히도 뜀박질에 미친 아줌마이긴 하다.

새벽 빗물 샤워도 제법 상쾌하고 괜찮다.

나의 토요일은 또 이렇게 시작됐다.

힘들다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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