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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Mar 06. 2022

잘 자요~

일상 이야기

"아니, 무슨 애가... 당최 밤에도 잠을 안 자고 낮에도 안 자고..."

"밤에 안 잤으면 낮에라도 자야지! 이건 자식이 아니라 웬수네!"


이 절규는 지금으로부터 약 48년 전, 1974년 4월의 어느 날

생후 1개월도 안된 갓난쟁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

이미 멘붕과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어느 초보 엄마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이 아기는 밤에 어찌나 잠을 안 자고 쉬야만 하며 보챘던지

하룻밤 사이에 천 기저귀 이십여 개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도저히 엄마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터라

잠을 재워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에너지 넘치고 젊었던 삼촌이 갓난아기를 안고

온 동네를 말처럼 뛰어다니며 잠을 재우려는 온갖 시도를 했지만

잠귀는 또 어찌나 귀신같이 밝고 예민한지

별 난리굿을 다 치면서 어렵사리 재워놓아도

조금만 부스럭거리거나 거친 숨소리만 들려도

눈을 반짝 뜨고 깨어나 말똥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기는 자라서...

여전히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에 잠귀는 어메이징 하게 밝고

늘 밤늦도록 잠을 안 자며

새벽까지 부스럭 거리는 야행성 아줌마가 되었다고 한다.

 

다들 눈치챘으리라 생각한다.

그 징글징글하게 잠 안 자던 아기가 바로, 지금의 거북 맘이라는 걸 말이다.




학창 시절부터 밤을 꼴딱 새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중요한 시험 앞에서도

나는 결코 평소에 착실히 예습 복습을 해둔다던가

시험 한참 전부터 미리미리 시험 준비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김광한의 밤의 디스크 쇼,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도 다 들어주고

주말의 명화도 꼬박꼬박 챙겨 보면서 빈둥대다가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제야 슬슬 발동이 걸려서 시험공부에 돌입하곤 했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급한 상황이 코앞에 닥치게 되면

평소에 없던 고도의 집중력이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저녁밥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밤 8시가 넘은 시간.

그 시간부터가 나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황금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새벽 5시까지, 혹은 아예 한숨도 자지 않은 상태로

그다음 날 아침에 있을 시험 과목들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암기했었다.

그러고도 여전히 칼같이 날카로운 정신 상태로 등교해서

밤새 공부한 내용들을 떠올리며 폭풍이 휘몰아치듯 시험을 치르고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초저녁까지 잠을 자고

다시 밤에 일어나서 그다음 날 있을 시험을 준비했었다.

그때는 기말, 중간고사를 몇 날 며칠씩 치르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른 나의 시험 성적은?

나쁘지 않...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제법 괜찮았었다.


이런 나의 야행성 학습 스타일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 늦게 시작한 해외에서의 대학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밤을 새울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아이들 둘의 등하교 준비와 라이딩, 학원 픽업, 학습지도

그 외에도 집안 살림까지 병행하면서

이제 갓 20살이 된 원어민 젊은이들과 함께 대학 공부를 하고

모든 과정들을 마치고 무사히 졸업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 등을 마치고 나면

아무리 빨라도 밤 10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인데

그때서야 비로소, 리포트를 쓰거나 과제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밤 10시부터 거의 새벽 2시 혹은 3시까지 학과 공부에 매달리고

남편의 출근과 아이들 등교 준비를 위해 아침 6시 기상...

그렇게 평일에는 평균 수면시간 3시간 정도를 유지하고

금, 토요일 같은 주말엔

그야말로 창 밖으로 서서히 동이 트고 아침 해가 밝아오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밤을 꼬박 지새우는 생활을 5년 가까이했었다.

그랬었기에, 늦은 나이에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시작한

늦깎이 대학 생활을 악착같이 따라갈 수 있었고

결국에는 성적 우수 학생으로 졸업 연설까지 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밤에 잠을 잘 안 자는 것뿐만 아니라 잠귀도 무척 밝고 예민해서

비행기나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푹 자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출발하기도 전에 먼저 피로감부터 몰려온다.

안 그래도 힘들고 피곤한 여정인데 이동시간 내내 거의 잠을 못 자니

그야말로 고문도 그런 고문이 또 없는 것이다.


"나는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들어."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밤늦게까지 안 자고 버틸 수 있는 대신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아?"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는 거다.


이미 예전 글들을 통해,

새벽 4시에 혼자 어둠을 뚫고 마라톤을 즐기는 

거북 맘의 취미 생활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제 새벽 1시쯤 잠자리에 들었어도

새벽 조깅을 위해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새벽 5시쯤엔 해안가를 달리고 있거나

고작 4시간 미만의 수면 후에도

종종 하프 마라톤 거리를 달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거북 맘은 당최 잠을 안 자면서 사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는 내 맘대로 수면과 기상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에

잠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밤을 새우면 됐었고

부지런히 서둘러야 할 일이 있을 땐

맞춰둔 알람보다 더 먼저 깨어나 새벽에 출발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 나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바로, 이제는 잠을 조절하기가 점점 힘들고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이 탓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마치, 평생을 좌우 시력 1.5~2.0을 자랑하던 내가

급격하게 노안이 찾아와서 이제 돋보기가 없으면

각종 설명서는 물론이고 제법 큰 활자도 인상을 쓰며 겨우 읽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제, 밤을 지새우는 건 옛날이야기가 된 지 오래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밝고 초롱초롱했던 예전의 눈빛은

이제 자정만 되어도, 신선도가 떨어진 어시장의 고등어 눈깔처럼

흐리멍덩하고 초점이 없어지곤 한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보고 싶은 유익한 채널들도 널렸는데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면

어느새 앉은 채로 반쯤 잠들어있는 나를 발견한다.


수많은 고문들 중에서

왜 잠 안재우는 고문이 가장 힘들고 참기 어려운 것 중 하나라고 하는지

요즘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오호통재라.

이렇게 늙어가는 것인가.



잠 앞에 겸허하게 무릎을 꿇은 요즘,

잠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이 나이에 깨닫고 있다.


질 좋은 수면이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적으로도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예전에는 정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푹 자고 일어난 후의 개운함과 가벼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와 자신감을 주기도 하고

잠들기 전 다소 걱정스럽고 우울했던 마음이

잠자는 동안 어느새 제법 자가 치유가 되어 

잠에서 깬 후에는 신기하게도 언제 걱정했었냐는 듯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긍정적으로 변해있기도 한다.


그뿐인가.

충분하고 질 좋은 수면은 피부미인이 되는 일등공신 이기도 하고

요즘 같은 때 면역력 향상에 필수적인 요소 이기도 하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인 반응이 잦아지며

신체의 면역력 또한 급격히 떨어져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직접 몸으로 느끼기도 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

그냥 잠을 자버리기엔 너무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에

늦도록 뭔가를 꼼지락 거리며 해야만 만족했던 나.


작가의 진솔한 작품은 역시 자정 이후에 나온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며

늘 새벽까지 뭔가를 끄적여야 안심이 되었던 나.


부족한 잠은 거북이들이 등교한 후

낮잠으로 때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마라톤을 하면서 뭔가 삐꺽 대는 내 몸의 반응을 느꼈다.


아무리 낮에 잠을 보충한다 해도

밤 시간에 충분히 잠을 자지 않고 생체리듬이 규칙적이지 못하다 보니

러닝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마라톤 훈련을 하면서

급격한 체력 저하는 물론, 때로는 러닝 도중 호흡도 힘들어지고

몸을 컨트롤하기 힘든 상황에 자주 부딪치곤 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난 1월에 있었던 경기에

그전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출전했다가

여태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신체의 이상 반응을 경험하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를 느끼며

완전히 식겁하고 겁을 먹은 이후로는

다시는 수면부족 상태로 뛰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모든 개체들 중

잠을 자지 않는 생명체가 과연 있을까?


잠의 치유력

잠의 회복력

잠의 기적

잠의 놀라운 효능


아직도 가끔씩, 한밤중의 고즈넉함과 여유로움에 매료되어

시곗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킬 때까지 깨어있을 때도 있긴 하지만

이내 스스로 훈계하며 잠자리에 들기를 재촉하곤 한다.


'자자, 이제 그만 자자.'

'포근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오늘 하루 동안의 근심과 걱정을 묻어버리고

내일 아침엔,  잠자는 동안 요정이 머리맡에 놓고 간

새로운 활력과 희망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기쁘고 힘차게 풀러 보자!'


세상의 모든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잠의 요정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잘 자요~편안하게 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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