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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22. 2022

내겐 너무 추운 시애틀

거북 맘의 미국 여행기 2화

사이판 공항을 출발해서 괌 공항 도착

괌에서 다시 일본 나리타 공항

거기서 다시 샌프란 시스코 공항으로

그리고 마침내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다.


3번의 환승과 지루한 공항에서의 기다림 그리고 긴 비행시간...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장장 26시간 동안의 비행은

드디어 2년 반 만에 여행을 떠난다는

감개무량하고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너끈히 감내할 수 있었다.


사랑니로 인한, 생각도 못한 엄청난 통증이 비행 내내 힘들게 했지만

비행시간 동안 타이레놀 한 통을 거의 다 먹을 정도로 진통제에 의존해가며

이미 몸이 약에 절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길고 긴 비행을 즐기려고 애썼다.


놀랍게도 기내식으로 나오는 음식과 디저트들도

아프지 않은 오른쪽 어금니로 남김없이 악착같이 먹어치웠고

혹시 술기운에 통증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을까 싶어

와인까지 두 잔이나 벌컥벌컥 마시는 나를 보더니

남편은 안타까운 표정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엄지 척을 해 주었다.


정말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한국 아줌마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떡진 머리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도착한 시애틀 공항.

미국의 다른 공항들을 조금씩 경험해 보긴 했지만

시애틀 공항은 뭔가 느낌이 좀 더 편안하고 덜 복잡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공항 밖으로 나온 순간.

'헉, 이 온도는?'

'바람 끝은 또 왜 이렇게 매서운 거지?'


이건 한국의 초겨울 날씨에 해당할 것만 같은 기온과 바람이었다.

아무리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 5월 말 이라고는 하지만

특히나 사이판에서 일 년 내내 한 여름의 열대기후 속에서 살던 내겐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리게 춥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거리고 있었다.


공항 근처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리고

우리 가족은 미리 예약한,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숙소로 이동했다.

인터넷으로 확인했던 조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박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며칠을 묵으면서도

당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거나 시끌시끌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그렇게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동네였다.


Des Moines라는 이 동네는 근처에 작은 항구가 있는 정말 깨끗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룸에 들어와 짐을 풀고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대로 잠에 빠져서 뻗어 버리기엔 아직 치통이 심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근처 약국을 찾아 여분의 진통제와 잇몸에 바르는 연고 등을 구입하고

가볍게 저녁 식사까지 해결한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전엔 인천 공항에서 대한항공 직항을 타고

친정 어무이가 시애틀 공항에 도착하실 예정이다.

큰 딸내미에게 줄 항생제와 소염 진통제를 한 아름 안고...




시애틀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화창한 아침 햇살을 기대했지만 역시 시애틀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지 눈이 내릴지 모를 우중충한 하늘과

도무지 사람 사는 동네가 맞는지 싶게 조용하고 차와 인적이 드문 썰렁한 분위기가

더더욱 시애틀에서의 첫 아침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달리는 거북 맘, 뛰어야 사는 거북 맘이 아니던가.

깜깜한 새벽이나 오밤중에도,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죽자 사자 뛰어다니던 거북 맘에겐 이번 여행 시작 전에 세운

나름대로의 소소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중엔 바로 '여행지마다 나의 러닝 본능과 족적을(?) 남기고 오자'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제법 진지한 나만의 버킷 리스트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여전히 욱신거리는 치통으로 인해 왼쪽 뺨이 얼얼하고

어제의 긴 비행과 바뀐 시차로 인한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임에도

나의 무모하고 무식한 성격은 그런 것에 전혀 굴하지 않고

계획했던 대로 일정을 시작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뭐야, 지금 조깅하러 가려고?"

"가능하겠어? 진짜 지독하다..."


주섬주섬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우와, 아침 공기가 완전히 냉장고 수준이네...'


코끝이 시리다 못해 빨개지고 손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드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 수준의 차갑고 신선한 아침 공기에

감개가 무량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대지방에서 늘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만 마시다가

이런 알싸하고 싱싱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달리기도 전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신문 배달이라도 할 것만 같은 자세로 숙소 주변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가

급기야는 멀리 보이는 항구까지 가보기도 했다.

공항 가는 길인듯한 도로를 따라 숙소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근데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도 없는지...

제법 긴 시간 동안 숙소 주변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건만

간혹 오가는 차 몇 대만 보았을 뿐, 굿모닝 인사를 나눌 행인과 마주치질 못했다.





차가운 날씨 덕분에, 그렇게 달리고도 땀이 거의 나지 않는 신기한 경험과 함께

시애틀에서의 첫 조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스타벅스의 본고장이라 그런가.

허름한 모텔에서의 모닝커피도 어찌나 훌륭하던지...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후

시애틀 공항으로 어무이를 마중 나갔다.


우리 1945년 광복둥이 김여사는

몇 년 전, 한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하신 덕분에

걸음걸이가 예전 같지 않고 조금 불편하시다.

걷지 못하시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힘든 부분이 있으셔서

비행기를 타게 되시면 늘 왕복으로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해오고 있다.


그래서 공항에서 우리 어무이를 기다릴 땐 아무리 사람이 많고 복잡해도

무조건 도우미 분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찾으면 된다.


생각보다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한 승객들이 많았는지...

몇 대의 휠체어를 보내고 나자, 드디어 눈에 익은 실루엣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팬데믹 이후로 처음 만나는 어무이.

무려 열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시애틀 공항에 도착한 김여사는

다소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옛다, 여기 약 있다. 얼른 약부터 먹어라."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주섬주섬 약부터 꺼내시는 김여사.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하기에

렌터카를 타고 시애틀 시내로 가는 동안 김여사의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그 약을 받아오기 위해 병원에서 어떤 생쑈를 하셨는지, 왜 진작 사랑니를 뽑지 않았는지 기타 등등.


바람도 스산한데 간간히 비까지 뿌리고 여전히 추웠던 시애틀의 날씨는

어무이와 우리 가족들이 느긋하게 시애틀 시내를 관광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하긴, 굳이 날씨 때문이 아니더라도

관광명소로 이미 유명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인파에 휩쓸리다 못해 떠밀려 다니는 지경인지라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애틀 시내에서 간단하게 점심과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방 하나를 새로 체크인한 후

김여사와 내가 한 방을 쓰고

남편과 두 거북이들이 다른 방에서 묵게 되었다.


드디어 김여사와 거북 가족이 함께하는 미국 여행이 시작되는 첫날인 것이다.


우리는 다음날 하루를 더 시애틀에서 머문 후

그 이튿날엔 나이아가라 폭포로 떠나는 일정이 시작된다.

다행히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듯한 치통이

본격적인 거북 맘의 미국 여행을 돕고 있는 듯하다.


김여사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나이아가라 폭포.

티브이에서 여행 채널로 나이아가라를 볼 때마다

죽기전에 언제 저길 한번 가보겠냐고 하던 김여사.

나이아가라 폭포야, 기다려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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