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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21. 2022

아무튼 떠나자!

1화 비행기는 치통을 싣고

"저 정도면 지금 어마어마하게 아플 텐데..."

"괜찮겠어? 아니 하필이면 어째 딱 날짜 받아놓고..."


마스크를 쓴 얼굴이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고통에 찬 내 표정을 알아챈 남편이 심란한 목소리로 걱정스레 묻는다.


"일단 조금 전에 진통제 먹었으니까 몇 시간은 괜찮겠지."

"그렇다고 비행기 안 탈 거냐고! 가야지, 무조건 가야지!"


그렇다, 이번 여행이 어디 그냥 보통 여행이냐 말이다.

비행기 티켓팅을 코 앞에 두고 갑자기 터진 팬데믹 날벼락에

거의 3년 가까이 옴짝달싹 못하고 섬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드디어 야심 차게 한국에 계신 친정어머니까지 모시고 함께 가기로 한 3주 간의 미국 여행.


게다가 7박 8일간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에는 미국에 계신 시부모님도 합류하실 계획이라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무려 3대가 함께 하는 

스케일 큰 효도관광이자 가족 여행이 아닌가 말이다.


이 여행을 위해 남편과 나는 무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 등을 샅샅이 뒤지며 정보 수집을 위해 이런저런 팁을 모아 왔고

평생 기억에 남을 후회 없는 여행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무던히도 공부하고 노력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얼마나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려고 그러는지

출발도 하기 전부터 강한 메시지라도 보내려는 듯

정체모를 통증이 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코로나 자가 진단 테스터로 체크해 봤지만

그쪽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저 몸이 안 좋으면 의례

가장 약점인 편도선으로 신호가 왔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편도염 약과 목캔디로 목의 통증을 달래 보았다.


그런데, 약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이제 통증은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동안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던

왼쪽 구석진 곳의 사랑니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뜬금없이 이 순간에 웬 사랑니?'

사랑니로 인한 통증이 이렇게나 사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걸

아주 제대로 깨닫게 된 계기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문제는 바로 내일 아침 일찍 사이판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무려 3번의 환승을 거쳐 25시간이 넘는 비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인 것이다.


며칠 전에만 알았어도 속 시원하게 치과에서 뽑아 버렸을 텐데...

망치로 두드려 깨고 드릴로 쪼아대기라도 하는 듯

통증은 점점 무지막지해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나의 몹쓸 결벽증 본능은 죽지 않아서

3주간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에 대비해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집고 락스 냄새 폴폴 풍기며 여기저기를 씻어내며 닦고 있었다.


3주간 우리 두 냥이들을 돌봐줄 pet sitter도 구하고

모래와 사료들도 채워놓고

이불빨래에 냉장고 청소까지...

엄청난 치통과 마치 싸움이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짐을 꾸리고 대청소를 하는 미련과 억척을 부렸다.


떠나는 날 아침.

처음 몇 번은 기적처럼 듣던 진통제도

이제 점점 약발이 떨어지는지 그다지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고

당연히 밤새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채 일어나 거울을 보니

햐~ 아주 기가 찼다.


혹부리 영감에라도 빙의된 듯

왼쪽 볼따구니가 띵띵 부어서 짝짝이가 된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던 것이다.


너무 아파서 다급하게 친정 엄마와 통화를 했던 지난 새벽.

이를 어쩐다냐, 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시던 어무이는

우리보다 하루 늦게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인천 공항에서 타실 계획인지라

당신이 단골로 다니는 병원에서 항생제와 각종 소염 진통제를 받아 오시겠다며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애끊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공항에 도착해서 무려 2년 반 만에 비행기를 타는 감격스러운 순간.

여전히 계속되는 치통은 나를 괴롭혔지만

타이레놀이 가득 들어있는 약통을 부여잡고 결심했다.

'까짓 사랑니, 이 따위 통증...(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프긴 했다)'

'아무튼 떠나자, 이게 얼마짜리 여행, 아니 얼마나 의미 있는 여행인데...'


그렇게 참기 힘든 치통과 함께

팬데믹 이후 2년여 만의 가족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치통을 싣고...

그래도 아무튼 떠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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