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풀
나는 제주의 옛 이름 가운데 ‘영주(瀛州)’를 유난히 좋아한다. 신선이 머문다는 뜻을 품은 이름, 그 말만으로도 바람결이 달라지고, 섬이 지닌 신비가 배어 나온다. ‘탐라’ 역시 오래된 이름으로 입가에 감돌지만, 내게는 ‘영주’라는 이름이 더욱 깊이 다가온다. 제주의 절경을 노래한 ‘영주십경’도 그 이름에서 비롯됐다. 성산일출과 사봉낙조, 영실기암, 녹담만설…. 그 하나하나가 이름만으로도 풍경을 불러내는 시어 같다.
그래서 나는 닉네임을 정할 때면 으레 ‘영주’를 쓴다. 브런치스토리에서는 닉네임 변경을 몰라 ‘한라산이 그리는 풍경’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 또한 내 두 번째 전자책의 이름이기에 나쁘지 않다.
‘한라, 영주, 제주’라는 이름이 붙은 식물들을 만날 때면, 더없이 친근한 감정이 일어난다. 한라구절초, 한라솜다리, 영주치자, 영주제비란….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흔든 건 ‘영주풀’이었다.
어느 여름날, 미기록종 ‘영주풀’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흘러왔다. 그 소식을 붙잡고 숲으로 달려갔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숲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햇살은 뜨겁게 빛나고, 울창한 그늘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낙엽 위에 앉아 숲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낙엽 사이로 아주 작은 구슬 하나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가느다란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줏빛 구슬.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영주풀이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작은 몸, 엽록소조차 없어 옅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비늘처럼 투명한 잎, 그리고 꽃술 끝에 맺힌 고운 솜털…. 마치 손을 대면 눈송이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연약한 생명. 그러나 그 속에 신령스러운 빛이 고여 있는 듯했다.
부생식물인 '영주풀'은 한 개체에 암꽃과 수꽃을 함께 피운다. 2007년 제주 서귀포의 숲에서 발견돼, '신령스러운 구슬'이란 뜻을 가진 이름을 얻었다.
짙은 여름 숲은 연둣빛에서 더 깊은 초록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늘을 가린 나무 그늘 아래, 낙엽과 곤충의 흔적들이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흙으로 스며든다. 숲은 그 언어로 숨결을 토하고, 그 숨결 위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영주풀은 바로 그 오랜 숨결 위에 피어난, 섬의 또 다른 신비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