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에서 노래하다

물봉선화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렇게 열광하던 계절을 보내고,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길목에서 들꽃들이 조심스레 축제를 연다.


여름과 가을을 잇는, 짧지만 눈부신 축제. 푸르게 무성했던 풀잎들이 아직 사그라들기도 전에, 자연은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다. 이별은 늘 아쉬움을 남기지만, 계절의 이별은 그마저도 아름답다.


어린 시절, 봉선화 꽃물을 들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손톱에 붉은빛을 물들이고도 모자라, 열 손가락 모두 봉선화의 주홍빛으로 가득 채우던 여름방학. 그 시절에는 계절이 바뀌어도 이별이 다가왔음을 알지 못했다.

밤새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도, 하늘 높이 떠오른 초승달에도, 떠나가는 여름의 흔적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손톱에 물든 꽃물이 반달에서 초승달로 바래 가는 동안, 시나브로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요즘은 문구점에서 쉽게 봉선화 꽃물을 살 수 있다. 말끔하고 고르게 물들일 수는 있지만, 그 속에는 어린 날의 추억이 깃들어 있지 않다. 언니와 동생이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꽃물을 들이던 시간. 붉게 물든 손톱을 바라보며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던 설렘. 그 기억들은 이제 아련한 추억 속에 남아 있다.


봉황새를 닮은 꽃이라 하여 ‘봉선화’라 불리는 이 꽃. 예부터 여인들의 추억을 품어 온 꽃이다. 그리고 봉선화보다 더 가녀린 꽃, 물봉선화. 습한 곳에서 자라기에 물봉선화라 불리는 이 꽃은 산기슭의 그늘진 곳에서 가냘픈 모습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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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가을을 교차하는 이맘때, 꽃씨를 받아 두려 했지만, 가늘고 여린 씨방은 손길이 닿기도 전에 톡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집 주변에 꽃을 피우려던 작은 소망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 아쉬움을 안고 여름의 끝자락에서 물봉선화 피는 산기슭을 찾았다.


물봉선화가 피기 시작하면, 여름의 열기는 누그러지고,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꽃 곁에서 조용히 귀 기울여 보라. 가을이 처음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이다. 저벅저벅,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실려 온 가을의 향기. 이른 아침, 살며시 피어난 물봉선화 한 송이에 가을의 첫걸음이 깃들어 있다.

물봉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즈음이면, 가을은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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