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좁쌀풀
가을꽃은 가장 먼저 한라산에서 피어난다. 꽃향기는 바람의 날갯짓을 따라 산허리를 휘돌다, 징검다리 건너듯 오름으로 내려앉는다. 가을바람은 부드러운 깃털이 되어, 살포시 발끝을 감싸며 속삭인다. 그 무거웠던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진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훨훨 날아오를 듯한 가벼움이라는 것을.
가을은 부드러운 바람으로 스치고 지나가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바람 속에 녹아든 가을의 속삭임을. 창가로 손을 내밀어 보라. 그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 깃든 가을의 서정에 닿는다. 곱게 물든 단풍이 아니더라도, 이미 가을은 우리 곁에서 소리 없이 익어가고 있다. 가을을 가장 먼저 만나고 싶다면 한라산을 올라보자. 그곳에는 이미 가을꽃이 만발해 있다.
억새가 은빛으로 춤추며 가을의 문을 열고,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청아한 종소리가 계절의 문턱을 부드럽게 흔든다. 가을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난날의 서운함과 아픔을 가을바람에 흩날려 보내야겠다.
한여름, 소중한 들꽃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마음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었던 날들이 있었다. 제 자식처럼 아꼈던 들꽃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 허전함은 한동안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들꽃을 사랑한다는 것은 손아귀에 쥐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예쁘게 피어나길 바라는 것임을. 그 누구도 보는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가을을 맞이한다.
깔끔좁쌀풀이 피어나길 바라며, 가을바람의 깃털을 타고 한라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초록 풀숲을 열고 선혈 같은 붉은빛으로 수줍게 피어난 꽃송이.
“나 여기 있어요.”
자그마한 목소리에 눈길이 머물자, 곳곳에서 붉은 입술을 연 꽃들이 작은 웃음소리를 흩뿌리며 반긴다. 그 순간, 행복의 날개는 가을 하늘 끝까지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그러나 너무 들떠서는 안 된다. 자칫 그 작은 꽃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밟아버릴 수도 있으니. 살금살금, 풀숲을 조심스레 살피며 한 발 한 발 옮긴다.
깔끔좁쌀풀, 제주 한라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자그마한 키에 좁쌀처럼 작은 붉은 꽃송이가 동서남북으로 피어난다. 굽은 털로 덮인 줄기는 마치 하얀 옷을 걸친 듯하고, 6mm 남짓한 붉은 꽃잎 안에는 작은 하얀 보석 한 알이 반짝인다. 그 작은 꽃 안에 깃든 섬세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저절로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깊어가는 가을, 그 부드러운 바람의 깃털을 잡고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라산을 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