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나팔의 울림

흰그늘용담

한라산 고산지대, 봄바람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양지바른 곳. 그곳에 작고 단아한 꽃이 피어난다. 높이는 겨우 5센티 남짓, 바람결에도 흔들릴 듯 가녀린 모습이지만, 그 안에 담긴 생명의 힘은 단단하다.


볕을 따라 피어난 꽃, 흰그늘용담

나팔처럼 생긴 하얀 꽃잎 속, 연두도 아니고 보라도 아닌 오묘한 색의 선이 은근히 스민다. 깊고 그윽한 음색을 지닌 관악기의 울림처럼, 그 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맑게 울린다. 바람이 불어올 때면 마치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하늘을 향해 맑은 소리를 뿜어내는 것만 같다.


이 꽃은 한국 특산종으로, 그늘보다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란다. 습한 땅 위에서 한 송이씩 소담하게 피어나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런데도 이름엔 ‘그늘’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어쩌면 그것은 봄볕이 내리쬐는 짧은 시간 속에서 꽃을 피워야 하는 숙명을 담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봄철, 나무들이 새 잎을 틔우기 전. 작은 들꽃들은 서둘러 꽃을 피운다. 따스한 볕이 깃드는 동안 꿀을 머금고, 곤충들을 부르며, 부지런히 수정의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 숲이 우거지고 나면 더 이상 빛을 받을 수 없기에, 봄이 주는 짧은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흰그늘용담도 마찬가지다. 4월 말부터 초여름까지, 숲이 짙어지기 전 마지막 햇살을 담아 꽃을 피운다. 앉은뱅이 꽃이지만, 그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

흰 나팔꽃 같은 모양새는 단아하면서도 고운 멋을 지녔다. 꽃잎을 열고 하늘을 향해 몸을 기울일 때면, 마치 세상에 청아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듯하다. 작은 들꽃 하나에도 이렇게 깊고도 맑은 울림이 스며 있다.

고산지대의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피어나는 꽃.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충분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 흰그늘용담은 그렇게 짧은 봄을 노래하고, 이내 스러져간다.


그 울림은 꽃보다 오래 바람보다 깊게 산속에 머문다. 마치 나팔 소리처럼, 한라산의 바람 속에 은은히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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