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으로 물들어 가는 숲길, 그 길은 사색의 길이자, 마음이 가장 평온해지는 길이다. 아가 손톱만 한 연초록 잎들이 나뭇가지마다 하나둘 돋아나며 숲을 수놓는다. 그 작은 잎들이 뿜어내는 빛은 눈이 부실 만큼 곱고 맑다.
풀꽃 한 송이 만나지 못해도, 연둣빛으로 번져 가는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숲 속에 머무는 시간은 가장 여유롭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깊은 사색의 순간이다.
연둣빛 이파리들이 팔랑이는 모습은 마치 봄나비 같다. 그 날갯짓을 바라보며 나도 새로 태어나고 싶어 져, 숲길을 따라 걷는 내내 싱그러운 생각들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숲 속으로 스며들자, 어디선가 노루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울려 퍼진다. 혹여 들개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움이 등줄기를 스친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다. 발걸음을 멈출 수 없고, 목적지가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길이다.
그 길 끝에서, 햇살처럼 찬란한 금붓꽃을 만나기 위해 나는 사월의 끝자락을 걷는다. 귀한 꽃이라 혹시라도 누군가에 의해 훼손될까 봐, 그 존재를 쉽게 알릴 수 없었다. 과연 올해도 만날 수 있을까.
금붓꽃은 제주에 없다고 알려졌지만, 제주의 어느 숲 어귀에도 햇살처럼 빛나는 금붓꽃이 조용히 자생하고 있다. 발에 밟힐 정도로 넉넉히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붓꽃 종류도 다채롭다. 아담한 각시붓꽃, 고산지대의 난쟁이붓꽃, 뿌리를 풀칠솔로 사용했던 솔붓꽃, 꽃대하나에 두 송이가 피는 노랑붓꽃, 노란 무늬가 선명한 노랑무늬붓꽃, 순백의 흰붓꽃, 잎이 두세 번 꼬여 있는 타래붓꽃, 그리고 귀화식물 등심붓꽃까지. 붓꽃의 가족들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숲을 물들인다.
금붓꽃을 찾기 위해 걷던 그 길 위에서, 나는 뜻밖의 꽃과 마주한다. 그것은 마치 무지개의 여신이 보내온 선물 같다.
눈앞에 펼쳐진 꽃은 금붓꽃보다 크고, 꽃자루도 다르다. 노란빛은 전혀 없고, 흰빛만 가득한 얼굴, 흰붓꽃일까 싶었지만 아니다. 그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 각시붓꽃은 바다보다 시린 청잣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순백의 얼굴을 한 이 꽃이 각시붓꽃이라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흰각시붓꽃. 드물게 만나는 이 꽃은 눈물처럼 시린 정잣빛이 아닌,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봄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며 춤추는 순백의 꽃잎, 그 모습은 말없이도 벅찬 기쁨을 전해준다.
금빛, 청잣빛, 흰빛이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 오름. 그곳에서 나는 사월을 보내고, 햇살처럼 찬란한 오월의 강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