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 수 있어 행복하다
2024.10.21. 월요일
10월 첫 주, Franky와 셰필드 학생회관 카페에서 처음 어색한 만남을 가졌었는데, 어느새 10월 말이 되었다. 2주 동안은 학교 밖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번 주는 다시 학생회관 카페, 일명 Revolutionary Cafe에서 약속을 잡았다. 오전에 운동을 마친 후 개운한 기분으로 카페로 향했다. 아직까지는 Franky와 만나는 게 떨림 반, 설렘 반이다.
카페 메뉴를 천천히 읽다가 'Crumpet'이 눈에 들어왔다. 한 끼도 안 먹은 공복 상태에다가 운동까지 해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커피 한 잔과 Crumpet을 시켰다. H가 Tesco 마트에서 사서 먹어보고 맛있다고 말해줘서 전부터 궁금했었다. Crumpet은 영국에서 주로 먹는 아침식사 메뉴 중 하나이다. 토핑을 여러 가지 고를 수 있었는데 크림치즈를 골랐다. 옆에서 보던 Franky는 주로 누텔라 잼과 먹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빵과 커피를 함께 하는 아침 겸 점심은 내가 삶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Franky는 오전 수업 전 밥을 먹었다고 해서 간단하게 핫초코만 마셨다. 달달한 음료를 좋아하는 것마저 Franky와 잘 어울린다. 지난주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지난주 요크 여행을 갔다 오면서 영국 도시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신나면서 말했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에 대한 칭찬을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역시 Franky는 기뻐하면서 자신도 요크에 갔다 온 적이 있다며 가족과 여행한 경험을 들려줬다.
Franky에게 요즘 한국어 수업은 어떤지 물어봤더니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단어랑 문법이 어렵다며 다른 친구들에 비해 따라잡는 속도가 느린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외국어 고등학교를 3년 다니면서 같은 고민을 했었다. 남들보다 이해하는 속도가 느려서 늘 속상하곤 했는데, Franky의 시무룩한 마음이 공감이 갔다.
"It's your first month and it's natural that you can't speak Korean right now. I mean, see I find difficulties saying in English!"
"Your English is really good!"
영국에 와서 막상 외국인들과 대화하려니 생각 안 나는 영단어도 많아서 스스로 회화 실력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인에게 이런 칭찬을 들으니 주눅 들던 언어 자신감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언어에 대한 배움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 토로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2시 40분을 향하고 있었다. 건물까지 20분을 걸어가야 했기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개강 후 3주 차가 되어가니 수업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사라지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수업 내용은 이해가 갔지만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교수님께서 토의하라고 하면 토의하고, 피피티 내용을 설명하면 무의식적으로 필기를 할 뿐이다. 그래도 이날 수업을 듣는 한 친구와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줄곧 내 옆 옆자리에 앉아 토의를 계속 같이 하면서 말을 트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교환학생 신분이었다.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 쉬는 시간에도 궁금한 점들을 물어봤다. 기숙사는 어디에 있는지, 사회학을 셰필드에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낯을 가리기는 하지만,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먼저 말을 걸고 자연스레 상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밥'을 먹고 싶어서 냉장고 털이를 했다. 고추장과 야채, 빠지면 섭섭한 단백질인 닭가슴살을 볶아서 흰밥 위에 툭 얹었다. 오늘 운동을 더 보람차게 느끼기 위해 계란후라이까지 구웠다.
요리 재료가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보여 내일은 꼭 장을 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채 잠에 들었다.
2024.10.22. 화요일
오전에 운동을 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운 뒤 장을 보러 나섰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느꼈지만 오늘따라 달달한 음식이 너무 당겼다. 한국에 있었으면 동네 근처 푸딩 집이나 쿠키 집에 가서 포장해 오거나 디저트 카페 배달을 시켰겠지만 이곳은 셰필드다. 외식과 배달비가 비싼 곳. 그래서 Tesco 마트에서 충동적으로 당근 케이크와 커스터드 크림 도넛을 집었다. 항상 장을 볼 때마다 포장된 케이크류들이 궁금했었다. 혼자 다 먹기에는 부담스러워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식욕은 가능할 것 같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갔다.
처음에는 이만큼 덜어왔었는데 다 먹고 나서도 허기가 졌다. 그때 직감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미치도록 식욕이 당기는 날.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날.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시간이 찾아오면 귀신같이 배란일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계속해서 케이크와 과자를 먹었다.
저녁에 플랫 메이트들과 함께 먹는 날이라 조절을 하면서 먹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먹어버린 바람에 배가 불렀다. 2시간 뒤쯤 저녁인데 이 이상 먹으면 속이 더부룩할 것 같아 이날 요리 담당인 Emily에게 채팅으로 오늘 속이 안 좋아 저녁을 건너뛰겠다고 말했다. Emily가 해주는 음식은 색다르고 맛있어서 기대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30분 뒤쯤 답장이 왔다. 괜찮냐고 물어보며 이따가 Tesco에서 바나나라도 사다 줄까 물어봤다. 친절한 마음에 내 마음도 같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음식이 안 들어갈 것 같아 거절했다. 얼마 안 돼서 답장이 또 왔다.
- I was trying to cook curry today, and if you want I can leave some in your tupperware.
Emily가 만드는 카레라니 너무 궁금했다. 락앤락 통에 보관했다가 내일 먹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되도록이면 플랫 메이트들과 하는 저녁식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언제 내가 외국인들과 요리를 하면서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소중한 기회를 6개월 동안 마음껏 누리고 싶다. 이날 밥을 같이 못 먹어서 아쉬운 마음을 그래도 Emily의 세심함 덕분에 달랠 수 있었다.
2024.10.23. 수요일
점심으로 Emily 표 카레를 먹었다. 뚜껑을 열었는데 내가 알고 있던 카레 비주얼과 달라 살짝 놀랐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한 입 먹었을 때 든 생각은 '강된장 맛이 나는데?'였다. 색깔도 맛도 강된장과 카레를 섞은 맛이 나서 신기했다. 처음에는 흰색 큐브 조각이 두부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씹으니 치즈였다. 하지만 두부라고 생각해서 먹으면 강된장 밥을 먹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고향의 맛을 뉴질랜드 플랫 메이트 요리에서 느낀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였다.
이날은 기숙사 방에 콕 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지난주 요크에서 산 Whittard English Breakfast tea를 드디어 개봉했다. 같이 개봉하는 머그컵과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 우려진 차 위에 우유를 조금 떨어트리는 순간이 차를 마시는 과정 중 제일 즐겁다. 우유가 차 속으로 들어가서 연기 모양을 내며 부드러운 질감을 만드는 모습은 작은 마법을 보는 것 같다.
브런치 글을 쓰고 방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저녁이다. 요리 당번인 이 날은 유독 더 설렜다. 로제 떡볶이를 플랫 메이트들에게 선보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떡볶이를 항상 요리해야지 생각했는데 빨간 떡볶이는 매워할 것 같았다. 또 요즘 해외 한식당에 흔하게 파는 메뉴이기도 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배달음식 메뉴 중 하나인 로제 떡볶이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에 있을 때 한 번 요리해 봤었는데 성공적이었기에 실패할 걱정은 없었다. 다만 로제 떡볶이 맛을 외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떡볶이랑 함께 양배추 계란 부침도 해야 했기에 7시 식사 시간보다 1시간 30분 전쯤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를 다 마치고 나니 7시가 다 되어갔다.
사실 양배추 전은 동그랗게 잘 펼쳐진 오코노미야키를 상상했는데 계란 물만으로는 양배추가 무게를 못 버텨 으스러졌다. 급하게 가위로 잘라 모양이 안 예쁜 부분을 밑으로 향하게 뒀다. 세팅을 다 했을 때쯤 Emily가 먼저 주방에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제 떡볶이를 설명했다. Emily는 며칠 전부터 냉장고에 떡이 보여 혹시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말했다. Nicholas는 조금 늦게 온다고 문자를 줘서 둘이서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Emily는 로제 떡볶이를 한 입 먹더니 너무 맛있다며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고 말했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It's a popular food among Koreans recently. We like to eat as a delivery food too."
Emily는 집에서 해 먹어 보고 싶다며 레시피를 물어봤다. 나는 그냥 고추장 떡볶이에 생크림이랑 치즈만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전에 떡볶이는 먹어본 적 있어도 이런 떡볶이는 처음이라고 말하며 고추장이랑 생크림 조합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관심을 많이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전형적인 '한국' 음식이 아니라 정말 한국에 오래 살고 있어야 아는 '요즘' 음식을 선보인 나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Emily는 일정이 있다고 해서 먼저 떠났다. 이후 Nicholas가 와서 떡볶이를 먹었다. Emily는 아시안 음식에 이미 익숙해서 긴장이 안 되었는데 Nicholas는 아시안 음식을 한 번도 안 먹어봤다고 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다행히 Nicholas도 맛있다며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고 말했다. 매주 누군가를 위해 요리해 주는 과정이 이렇게 즐겁고 뿌듯한 줄 몰랐다. Shared cooking을 통해서 또 다른 '나'를 알아가는 것 같다.
2024.10.24. 목요일 ~ 2024.10.26. 토요일
스코틀랜드의 도시, 에든버러 여행을 H와 함께 2박 3일동안 떠났다.
https://brunch.co.kr/@48328c1b40d54d6/23
2024.10.27. 일요일
이틀 동안 잠시 집을 떠났을 뿐인데 오랜만에 기숙사 방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늑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제는 앨런코트 기숙사 방이 정말 내 '집'이 되었구나.'
여행 후 나는 재빨리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얀 이불을 개고 그 위에 베개를 올려둔 뒤 운동복을 입고 헬스장에 갔다.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다리 근육과 전신을 근력 운동으로 풀어줬다. 상쾌한 기분으로 운동을 마치고 기숙사 우편함을 봤는데 편지 봉투 2개가 보였다. 영국에서 쓰기 편하다는 '몬조 카드'를 한 달 전부터 발급 신청했는데 계속 도착하지 않아서 한 번 더 신청했었다. 맙소사 그래서 카드가 2개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체크카드가 2개 생겼다. 똑같은 카드가 2개 온 모양이 꽤나 웃겨서 사진을 찍었다.
운동 후 샤워를 하면서 항상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한다. 에든버러 여행을 다녀온 동안 금요일에 Nicholas가 요리 당번이었는데 내 음식을 락앤락 통에 담아주기로 했다. Nicholas 요리와 냉장고에 남겨둔 양배추 전을 먹기로 했다. 이날 유독 배가 고파 베이글에 후무스까지 야무지게 발라서 먹었다. 항상 이 시간이 내 셰필드 일상 중 행복하다. 땀을 흘리고 깨끗이 샤워로 씻은 다음 배가 고픈 상태에서 먹는 음식. 내가 오전 공복 운동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10월의 끝자락이 다가왔다. 영국에 온 지 2달밖에 안되었는데 5개월은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11월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벌써?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새로운 경험들을 접하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경험들이 전부 소중해서 계속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까.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느리게 흘러갈 수 있는 시간 속에 살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