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을 맞이한 남편을 바라보며,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조카들이 어렸을 적, 우리 집 마당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요. 그 중심에는 언제나 술래가 되어 뛰어다니던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서 숨고, 쫓고, 웃고, 때론 일부러 져주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리 시어머님은 항상 형제들끼리 ‘우애하며 살아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순천형님이 둘째 아들을 출산할 때입니다. “형수님! 우리 조카 낳느라 수고 많이 하셨어요.” 전화드린 모습을 보며 이 사람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친정은 대체적으로 좋게 말하면 입이 무겁고 나쁘게 말하면 표현이 없고 각자 무관심한 편입니다. 서로 자주 연락도 하지 않고 소식이 없어도 잘 있으려니 합니다. 서로 만나서 힘든 형제들이 있으면 몰래 스치고 지나가듯 호주머니 속에 돈 봉투를 쓱 넣어 줍니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그저 말없이 지나갑니다. 우리 친정어머니는 늘 우리 새끼들은 말이 없는 게 본인 닮았다고 합니다. 잘못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되되 하게 보일 수 있으니 어른들 뵈면 살갑게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시집과 친정의 문화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없고 다들 성격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 시대는 종은 울려야 종이고 새는 울어야 새이고 사랑은 표현해야 한다고 합니다. 알아도 어찌 그게 한 순간에 바뀔 수 있을까요? 그래도 나이 들어가니 친정 형제들도 요즘 통화 하면 옛날이야기로 말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남편은 참 잘 웃는 사람입니다. 인사성도 바르고 아는 사람만 지나가면 스쳐지나지 않고 먼저 가서 말도 잘 걸고 인사도 잘 합니다. 집에서도 저와 오랜만에 찾아온 자녀들에게 안마도 잘해줍니다. 청소도 잘합니다.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안마 받을 때 마다 "우리 아빠! 최고 너무 시원흐다. 이제 제가 아빠 해드릴께요." 합니다.
딸은 저를 닮아 표현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여자분들 “고맙다는 말, 한 번만 해주면 안 되나요?” 사실 저와 딸 마음속엔 고마움이 있습니다.
다만 표현이 서툴러서 무뚝뚝하게 ‘알았어’ 한 마디로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 남편이 어느새 칠순입니다. 아직도 조카들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나가 “야, 내가 술래다!” 소리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름휴가만 되면 고향으로 달려가 형제들과 만났습니다.
조카들이 우리 자녀들과 함께 고만고만하게 자랐습니다. 남편은 늘 술래가 되어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창고, 마루 밑, 장독대 뒤, 문간방 부엌, 목욕탕, 뒤뜰에 있는 감나무 뒤, 아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습니다.
남편은 알고도 찾지 못한 척 이곳저곳을 찾았습니다.
장난 끼가 발동하면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지 않고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쫓아와서 “술래가 우리를 안 찾으면 어떡해요 삼촌” 하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럼 삼촌이 숨어요. 우리가 찾을게요.”
못 이긴 척 남편이 또 나갑니다. 아이들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기둥에 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열 번이나 집안이 떠나가게 외쳤습니다. 남편은 창고와 돼지 막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이 좁아서 배가 튀어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어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어느새 참 많이 흘렀습니다. 요즘 가족 카톡 방을 제일 먼저 깨운 건 항상 남편입니다. 손녀딸 사진을 편집해서 올리고 인사합니다. 이제는 손녀딸 바라기가 되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여우와 네 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세시부터 마음이 설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손녀딸과 만나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설렙니다. 다이소가 단골이어서 풍선, 스티커 캐릭터, 크레파스, 켄터지, 뽀로로 인형, 머리띠 등을 사 옵니다. 유리창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스티커를 미리 붙여 둡니다. 그리고 모서리마다 부딪치지 않도록 미리 쿠션 접착제도 발라 둡니다.
시간은 우리 둘의 머리에 흰 서리를 내렸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느릿느릿하게 들립니다.
함께 걸어온 날들 속에는 눈물도 많았지만 그 눈물로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했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아직도 어색하지만, 문득문득 이런 글로라도 마음을 꺼내봅니다.
당신 고맙습니다. 앞으로 손녀딸과 오래오래 술래잡기해주세요.
되되 하다 뜻 - 거만하다 (전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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