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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과수원 데이트를 아시나요?

by 진주

"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라는 시도 있듯이, 뒷동산 포도밭에 청포도가 아닌 킴벨리 포도가 익어가고 있었다.

미리 포도막도 짓고 삼일에 한 번씩 익은 포도를 수확했다.


그때마다 아침밥 지어서 포도막으로

가져갔다. 바쁠 때라 따로 전 붙 칠 시간이 없었다. 어린 풋고추 얇게 어슷어슷 썬 다음 되직하게 한 밀가루 반죽에 썰어놓은 고추와 함께 뒤적뒤적해 두었다. 조선장으로 간 맞추고 밥이 뜸이 들 때쯤 보자기 깔고 반죽을 부었다. 밥도 퍼지고 고추 풋 내음 풍기며 알맞게 익었다.

조선간장, 참기름, 마늘, 볶은 깨, 넉넉하게 넣은 양념장로 고추 적 위에 숟가락으로 끼얹어 주었다.




고추 피자처럼 도톰하게 썰어놓으면 너도 나도 맛있다며 젓가락이 부산을 떨었다. 봄에 담아놓은 멸치 젓도 삭아서 비린내도 나지 않고 고소했다. 매운 풋고추와 파, 마늘, 참기름, 깨소금 솔 솔 뿌리면 짭짤한 멸치 젓도 여름철에는 훌륭한 반찬이 되었다. 간 갈치도 프라이팬보다 가리 불에 적사 놓고 노릇노릇 구워내면 우리 집에서 키우던 메리도 맛있는 냄새에 혓바닥을 빼고 부엌을 왔다 갔다 했다.

간 갈치를 먹고 난 후에는 간이 배어 있는 손가락만 빨아도 간간 짭짤하니 맛있어서 밥 한술 더 먹었다.




익은 포도 수확하고 난 후에는 극상품 포도송이를 가려서 나무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송이가 좋치않는 바라품도 따로 나무상자에 담았다.

그 작업이 끝나면 삼촌들이 리어카로 섬진강까지 끌어가 배에 실었다.

또다시 리어카로 역전까지 끌가서 화물칸에 실었다. 엄마는 저녁 기차를 타고 여수 청과물 공판장으로 가셨다.


봄이 오기 전 병충해 방지를 위해 포도나무껍질 벗겨주었다. 봄이 되어 새순이 돋아나면. 웃 순도 따주었다. 어지는 포도송이 일일이 종이봉투로 싸서 길렀던 포도는 새벽 도매시장 경매로 붙여졌다.

그리고 사방천지로 출하되었다.

그 덕분에 여름 한철 우리 집은 여유로웠고 멸치, 간 갈치, 마른 명태 등 박스로 사 오셨다.




우리 집에서 같이 일하셨던 윤 씨 아저씨 동현이 오빠 고생이 많았다.

우리들이 배가 아프면 된장 물 심심하게 풀어서 시라고 주었다. 그러나 일하시분들이 아프면 읍내로 달려가서 약을 지어오셨다. 우리 집에서 가장 수고하고 애쓰시는 분들이라 항상 귀하게 여기셨지만, 바쁜 철에 일손이 멈추면 안되서였을게다.

오랜 세월 같은 식구처럼 지내다가 헤어서 지금도 그분들이 그립다.




할머니, 동녘 굴 고모할머님과 함께 포도 막을 지키셨다.

점심때가 지나면 다른 동네 처녀, 총각들이 짝을 지어 포도밭을 찾아왔다. 그때 당시 유일한 놀이였고 데이트였다.

모처럼 외출이라 아가씨들은 멋을 내느라

양산 쓰고, 리 잘록하게 들어간 원피스, 주름치마와 블라우스 입고 왔다.

그리고 비뚤비뚤한 골목길을 뾰족구두 신고 올라오다 돌멩이에 앞코가 다 까지기도 했다.

복숭아, 포도 철이 되면 누구누구 연애한다는 소문이 이 동네 저 동네로 퍼졌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결혼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여름 한철 뒷동산 포도밭을 뻔질나게 올라 다녔던 그 길에 재관이네 감나무 밭이 있다.

타리 너머 쭉 뻗은 단감나무 한그루는 내 몫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아직 맛도 들지 않은 단감 하나씩 따 먹었다.

지난해 재관이가 수확한 단감 한 박스를 보내주었다. 마트나, 시장에서 삶은 계란 까놓은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생긴 단감보다 훨씬 자유스러운 생김새가 정감이 갔다. 무릎에 실실 닦아서 먹던 그때를 생각하며 한자리에서 서너 개 먹어치웠다.




재관이네 감나무 밭이 동네 어귀에 지금도 자리 잡고 있어서 고향 갈 때마다 그 길을 지나오면 괜스레 웃음이 실실 나는 건 왜일까? 키가 닿지 않아 단감을 따려고 행여 누가 볼까 가슴 졸이며 발 돋음하고 훌쩍훌쩍 뛰었던 생각이 나서 일 것이다.


우리 집 포도밭은 지금 예쁜 집이 지어져 있다.


# 청포도 # 데이트 # 포도밭 # 단감 # 양산 # 뾰족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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