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
15세기말, 유럽의 항해자들에게 적도를 넘어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적도를 넘어 남하하면 유일한 길잡이였던 북극성이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하늘의 등대를 잃는다는 것은 신의 가호가 닿지 않는 바다에 고립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 발견된 남쪽하늘의 뚜렷한 십자가 모양은 종교적 환희와 경외의 순간이었다.
생각의 맛집 호주생활 경험담 (5) 작가 Sunshine ・ 2025. 2. 13. 10:14 출처 네이버 블로그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함대(1519-1522)에 동행했던 역사가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그의 항해 일지에 "빛나는 다섯 개의 별로 된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것이 서쪽으로 곧장 있으며 별들 간에 서로 매우 정렬되어 있다."며 감격에 찬 어조로 기록했다.
대항해시대에 이 ‘하늘의 십자가’는 새로운 ‘하늘의 나침반’이 되었고, 고난을 이겨낼 희망의 증표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의 탐험과 정복, 그리고 뒤따를 선교 활동에 강력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늘이 직접 십자가를 보여주었기에, 그들의 모든 행동은 ‘신의 뜻’을 따르는 성스러운 임무로 격상될 수 있었다.
남십자성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 ‘탐험의 별’이 되었다.
한편, 호주에는 ‘에뮤’라는 날지 못하는 거대한 조류가 있는데, 4월에서 7월의 산란기에 900g 가까운 거대한 알을 낳아서 원주민들의 중요한 먹거리가 된다.
에뮤는 캥거루와 함께 호주 국장(國章)의 양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호주 50센트 동전에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동물이다.
이는 두 동물이 "뒤로 걷지 못한다"는 특성에서 유래하여 호주가 항상 전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과거 호주 원주민에게는 남십자성은 굶주림을 해결해 줄 친숙하고 유용한 동물인 ‘에뮤’가 하늘로 올라간 형상, 즉 ‘하늘의 에뮤’로 보였다.
By Sodacan - 자작; Based on the painting at the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 item barcode 98430,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2871765 출처위키백과
남십자성은 밤하늘의 88개 별자리 중 가장 작지만, 1~3등급의 밝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어 눈에 쉽게 띈다.
특히 우리 은하의 별들이 가장 빽빽하고 밝게 빛나는 은하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은하수라는 거대한 강에 떠 있는 보석 십자가처럼 보인다.
남반구에서는 1년 내내 볼 수 있으며, 북위 33도 이남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고 마라도 남쪽 이어도에서는 겨우 십자가 위쪽 별이 보이기 시작한다.
‘十’ 자 모양이 정남 쪽 방향에 매우 근접해 있기에 대항해시대 이래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십자가 위쪽 별과 아래 별의 4.5배 거리만큼 밑으로 따라가면 하늘의 남극을 찾을 수 있다. 남극을 가리키는 남십자자리의 두 별을 '지극성(指極星)'이라 부른다.
By Don Pettit, ISS Expedition 6 Science Officer, NASA - NASA [1], modified by Kookaburra,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11229 출처 위키백과
이 완벽한 십자가를 이루는 다섯 개의 별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크룩스 (α Crucis)는 십자가 아래쪽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이별은 사실 3개의 별이 가까이 붙어 있는 '삼중성'계이다. 지구에서 약 320광년 떨어져 있고, 밝기가 태양의 25,000배에 달할 만큼 눈부시다.
십자가 왼쪽 팔은 베크룩스 (β Crucis)이다. 푸른빛을 내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 밝기를 바꾸는 '변광성'이다. 주기적으로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마치 우주의 맥박처럼 고동친다.
십자가 위쪽 꼭지인 가크룩스(γ Crucis)는 에너지를 거의 다 쓰고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늙은 별'이어서 붉은색을 띤다. 남십자성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약 88광년)이다.
오른쪽 팔인 델타 크루시스 (δ Crucis)는 태양보다 5,800배나 밝지만 지구로부터 약 345광년이나 떨어져 있어 다른 별들보다 조금 어둡게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의 균형을 완성하는 중요한 별이다. 나이는 약 2,800만 년의 젊은 별이다.
한편, 오른쪽 팔 옆에 있는 기난(ε Crucis)은 크기가 태양지름의 약 30배이지만 지구로부터 약 230광년 떨어져 있어 어두워 보인다. '기난'은 호주 원주민의 언어로 '지식의 노래가 담긴 주머니'를 의미하는 신화적 이름이다. 포르투갈어로는 십자가에 '끼어든 별'이라는 뜻의 '인트로메티다(Intrometida)'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이 별을 남십자성에 포함하느냐가 논쟁이 되기도 한다.
남십자성의 다섯 별은 서로 다른 밝기, 거리, 색깔, 모양 등을 한 다양한 별들이 한데 어울려 밤하늘의 영롱한 십자가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퓨 리서치 센터 등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약 81억 명 중 약 26억 명이 기독교인이다.
이 중 약 77%인 20억 명이 북반구에, 나머지 23%인 6억 명이 남반구에 살고 있다.
언뜻 보면 기독교인이 더 많은 북반구가 더 '기독교적인' 지역 같지만, 지구 인구의 90%가 북반구에, 단 10%만이 남반구에 사는 극심한 인구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 인구 차이를 감안해서 인구 대비 신자 비율(밀도)을 계산해 보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북반구는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이 약 27% (4명 중 1명)에 불과하지만, 남반구는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이 약 75% (4명 중 3명)에 달한다.
즉, 기독교인의 절대적인 숫자는 북반구가 많지만, 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신앙의 밀도는 남반구가 압도적으로 높다.
브라질(약 90%)처럼 남미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은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다.
남반구의 하늘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떠 있고, 땅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심장부가 되었다.
하늘의 서명은 곧 땅의 정체성이 되었다. 남십자성은 여러 신생 국가의 국기에 새겨지며 그들의 역사와 비전을 담아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호주 국기의 오른쪽에 그려진 5개의 별은 남반구 대륙 국가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큰 별 4개는 7 각성으로, 작은 별 하나는 5 각성으로 그려 실제 별의 밝기 차이까지 세심하게 표현했다.
뉴질랜드는 4개의 붉은 별만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상징적 형태에 집중했다. 별의 붉은색은 원주민 마오리의 신성한 색을, 흰 테두리는 남태평양의 파도를 뜻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브라질 국기 중앙의 파란 원은 1889년 공화국 탄생일 아침,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실제 밤하늘이다. 남십자성은 바로 그 하늘의 중심에 그려져, 국가 탄생의 순간을 지켜본 ‘신성한 증인’ 임을 의미한다.
By Raimundo Teixeira Mendes - SVG implementation of Lei n. 8.421 de 11 de maio de 1992. The official construction sheet can be found in the law's annex.,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61734 출처 위키백과
이처럼 남십자성은 각국의 국기 속에서 단순한 별이 아닌, 그 나라의 역사와 철학, 미래의 비전을 담아내는 ‘하늘의 서명’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성경 ‘욥기’에는 여러 별자리 이름이 나온다. 그중에는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기 9-9)라는 구절도 있다.
오늘날 남반구가 기독교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현실은, 수백 년 전 그 하늘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신의 서명'이라 확신했던 유럽인들의 역사가 낳은 결과물일 수 있다.
하늘의 상징은 땅의 신앙을 뒷받침했고, 땅에서 퍼져나간 신앙은 다시 하늘의 상징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은 서로를 비추고 증명하며 끊임없이 메아리쳐 왔다.
슈퍼컴퓨터의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십자가 위쪽 별인 가크룩스 (γ Crucis)는 앞으로 서서히 더 위쪽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위로 더 커질 십자가’라는 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남십자성이 상징하는 희망과 믿음, 즉 ‘신의 가호’에 대한 염원 또한 더 크고 깊어질 것이다.
하늘의 십자가는 그렇게 땅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도 남반구의 밤하늘에서 고요히 빛나며 인류가 써 내려가고 있는 장대한 신앙의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다.
By Sean Vivek Crasto - http://picasaweb.google.co.uk/sean.crasto/Corcovado/photo?authkey=jascxXymkiA#5056247582402143986,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991540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