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문패를 달자
우리는 모두 주소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OOO구, OOO동… 이 익숙한 주소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지를 증명해 주고, 그래서 안전하다는 표식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1887년 소설 <주홍색 연구>에서 주인공 셜록 홈스와 존 왓슨 박사가 함께 하숙하는 집의 주소로 런던의 '221B 베이커 스트리트'라는 가상의 주소를 설정했다.
셜록 홈스 시리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독자들은 셜록 홈스를 실존 인물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독자들은 그 가상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사건의뢰, 소설에 대한 찬사, 안부문의, 인생상담 등 다양했으며, 연간 700여 통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1930년대에 베이커 스트리트가 확장되면서 실제로 '221번지'가 생겨났고, 이 주소에는 '애비 내셔널 은행'이 들어섰다.
홈즈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은행으로 쏟아졌다. 결국 은행은 이 편지들을 처리하기 위해 '셜록 홈스 담당 비서'라는 직책을 만들었고, 수십 년간 홈즈를 대신해 팬들에게 정중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가, 1990년, 베이커 스트리트 239번지에 '셜록 홈스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912929 출처 위키백과
박물관은 '221B'라는 문패를 달고 싶어 했지만, 여전히 은행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박물관과 은행 사이에는 '누가 셜록 홈스에게 오는 편지를 받을 권리가 있는가'를 두고 10년 넘게 우호적인 '주소 분쟁'이 벌어졌다.
이 '편지분쟁'으로 양측 모두 유명세를 탔고, 관광객이 모여드는 등 홍보 효과를 톡톡히 거두게 되었다.
마침내 2002년, 은행이 이전하면서 런던 시는 박물관이 '221B 베이커 스트리트'라는 주소를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이 에피소드는 하나의 주소가 어떻게 허구를 넘어 강력한 문화적 실체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제 인류의 시선이 광활한 우주로 향하면서, 이 우주 속에서 우리의 주소는 어디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주 속 우리 주소는 셜록홈스의 주소처럼 허구와 실제가 혼재된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서 비로소 ‘꽃’(김춘수, 꽃)이 된다는 시어처럼,
우리 지구의 주소를 붙여 줌으로써 우리도 우주의 당당한 일원이고, 또 지구의 공식 주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현대 천문학이 밝혀낸 우리의 주소는 아홉 단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서사시다.
이제 ‘은하철도 999’를 타고, 우리의 작은 집 지구에서 출발해 이 장대한 주소를 따라가 보는 여행을 시작해 보자.
출발: 태양계 3번지, 지구
우리의 여정은 푸른 대기와 흰 구름으로 감싸인 행성, 지구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우리의 유일한 집이며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우주로 향하는 첫걸음은 이 집의 대문을 나서는 것이다. 지구를 떠나 달의 궤도를 지나자, 생명과 문명으로 소란스럽던 우리 행성은 이내 고요하고 평화로운 푸른 구슬이 된다.
첫 번째 경유지: 태양계
우리의 첫 상위 주소는 태양계다. 한때 우주의 전부라고 여겨졌던 이곳은 이제 여덟 개의 행성이 태양의 거대한 중력에 묶여 함께 우주를 여행하는 ‘가족’처럼 보인다.
50억 년 가까이 지구 생명의 원천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던 태양은 이제 그 절대적 지위를 잃고, 우리 은하에 속한 수천억 개의 별 중 하나로 멀어져 간다.
두 번째 경유지: 오리온 팔
태양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두 번째 주소인 ‘오리온자리 팔’에 들어선다. 이곳은 우리 은하라는 거대 도시에 속한 하나의 동네, 혹은 한적한 교외 지역과 같다.
우리 태양계는 은하 중심부로부터 약 27,000광년 떨어진 이 나선팔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밤하늘의 은하수는 바로 이곳에 있는 지구에서 우리 은하의 중심부를 바라본 모습이다. 이 주소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명확히 깨닫게 한다.
세 번째 경유지: 우리 은하
오리온 팔을 벗어나 더 깊은 우주로 나아가면, 약 2천억 개의 별들이 모인 거대한 소용돌이, 우리의 세 번째 주소인 ‘우리 은하’를 마주한다.
직경 10만 광년, 폭 3만 광년에 달하는 별들의 도시다.
빅뱅 직후, 물질이 조금 더 뭉쳐 있던 곳은 강한 중력으로 주변의 가스를 끌어당겼고, 이 가스 구름이 뭉쳐 최초의 별들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아주 작은 '원시 은하'의 탄생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 은하들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끊임없이 충돌하고 합쳐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눈덩이가 불어나듯 점점 더 큰 은하로 성장해 나갔다.
우리 은하의 나선팔에서는 지금도 가스와 먼지가 뭉쳐 새로운 별들이 갓난아기처럼 태어나고 있다.
중심부의 초거대 질량 블랙홀 ‘궁수자리 A’는 모든 별들을 이끌며 초속 약 270km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나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 역시 수십억 년 전, 은하에서 폭발한 별들이 흩뿌린 유산, 즉 ‘별의 먼지’다. 이 깨달음 속에서 나의 삶은 우주의 거대한 순환과 연결된다.
네 번째 경유지: 국부 은하군
우리 은하는 약 80여 개의 은하들과 함께 네 번째 주소인 ‘국부 은하군’이라는 작은 집단을 이룬다.
이곳은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중심이며, 지름 약 1,000만 광년의 '아령' 모양을 한 ‘우주적 동네’다.
안드로메다 은하는 이곳의 '대장'이다. 직경이 약 22만 광년, 별의 개수가 약 1조 개에 달하는, 우리 은하 보다 2배 이상 큰 거대 은하이다.
남반구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대마젤란 은하와 소마젤란 은하는 우리 위성 은하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통 불가능한 이웃’이다. 지금 당장 빛의 속도로 안드로메다에 편지를 보내도, 답장을 받기까지는 500만 년이 걸린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만, 영원히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이방인들이다.
다섯 번째 경유지: 처녀자리 초은하단
국부 은하군은 다시 수천 개의 은하가 모인 거대한 ‘대륙’, 약 1억 1천만 광년에 걸쳐 펼쳐진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변방에 위치한다.
우리 국부 은하군은 그 막강한 중력에 이끌려 서서히 초은하단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여섯 번째 경유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처녀자리 초은하단마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일부임이 밝혀졌다.
하와이어로 ‘헤아릴 수 없는 천국’을 의미하는 이곳은, 단순히 은하가 모인 집단이 아니라 같은 중력 중심을 향해 함께 흘러가는 거대한 ‘강’과 같다.
약 10만 개의 은하들이 모두 ‘거대 인력체’라 불리는 한 지점을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운명 공동체다.
일곱 번째 경유지: 물고기자리-고래자리 복합 초은하단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역시 더 큰 구조의 일부다. 우리의 일곱 번째 주소는 ‘물고기자리-고래자리 복합 초은하단’이라 불리는 거대한 은하 필라멘트다.
필라멘트란 은하와 은하단들이 실처럼 길게 늘어선, 길이 10억 광년에 달하는 ‘우주 고속도로’다.
이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은하가 아니라, 우주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이지 않는 중력 접착제’, 암흑물질이다.
이는 우주가 무작위로 흩어져 있지 않고, 거대한 그물망(Cosmic Web)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주소: 관측 가능한 우주
이 모든 구조는 우리의 마지막 주소, ‘관측 가능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 이는 우주 전체가 아니라, 우주의 나이인 138억 년 동안 빛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영역만을 의미한다.
우주 팽창 효과 때문에 그 직경은 약 930억 광년에 달하며, 그 안에는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계 너머에도 우주는 계속 펼쳐져 있겠지만, 그 끝은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이 모든 구조를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미지의 ‘밀어내는 힘’, 암흑에너지가 우주 팽창을 가속시키고 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d/2MASS_LSS_chart-NEW_Nasa.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44799
By IPAC/Caltech, by Thomas Jarrett - "Large Scale Structure in the Local Universe: The 2MASS Galaxy Catalog", Jarrett, T.H. 2004, PASA, 21, 396, 퍼블릭 도메인, 출처 위키백과
여정을 마치며
이제 우리는 지구의 완전한 우주 주소를 쓸 수 있다.
“우주 → 물고기자리-고래자리 복합 초은하단 →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 처녀자리 초은하단 → 국부 은하군 → 우리 은하 → 오리온 팔 → 태양계 → 지구”
이 기나긴 주소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이 푸른 행성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장소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우리는 은하 중심부의 격렬한 방사선과 잦은 천체 충돌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하고 안정적인 변두리에 자리 잡았다.
이 ‘좋은 위치’ 덕분에 지구는 45억 년간 생명을 잉태하고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동시에 완전한 고립을 의미한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센타우르스 자리 별들하고도 4.3광년, 가장 빠른 우주선으로 5만 년 이상 걸리는 ‘소통 불가능한 이웃’들이다.
우주적 재난이 생긴다 해도 외부의 지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는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철저히 혼자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지켜야 한다.
디지털 지도에서 길을 잃은 모든 데이터가 위도 0°, 경도 0°의 가상공간 ‘널 아일랜드(Null Island)’로 흘러간다.
만약 우리가 이 푸른 행성이라는 구체적인 좌표를 잃어버린다면, 인류는 정처 없이 표류하다 의미 없는 데이터처럼 '우주의 널 아일랜드’에 버려질지도 모른다.
인류의 위대한 도전은 이 작은 행성 위에서 우리의 주소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 이제 우리의 지구 입구 어디쯤에 우리의 문패를 달자. 그 문패의 주인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