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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블이 읽은 하늘 천 따 지

호기심이 혜안을 불러온다

by 김대군

하늘의 텅 빈 한 점을 찍다


오랫동안 인류는 밤하늘의 별 너머 광활한 어둠을 텅 빈 공간이라고 여겨왔다.


1995년 12월, 당시 허블 우주망원경의 책임자인 로버트 윌리엄스는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밤하늘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한 점을 찍어보자고 제안했다.


이윽고, 허블은 큰 곰자리 근처의 아무 별도 없는 미세한 한 점에 렌즈를 고정했다.


바늘로 콕 찍은 것 같은 한 점이다, 하늘 면적의 2400만 분의 1에 불과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건 또 다 뭐란 말인가! 열흘간의 노출 끝에 전송된 사진은, 텅 비었을 거라 예상했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천 개의 빛나는 점들이 가득했다.


놀랍게도 그 점들은 별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수천억 개의 별을 품은 거대한 은하였다.


빈 공간이라고 여겼던 곳에 3,000개에 달하는 은하가 좁쌀처럼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는 ‘허블 딥 필드(HDF)’라는 이름이 붙었다.


Hubble_ultra_deep_field_high_rez_edit1.jpg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d/Hubble_ultra_deep_field_high_rez_edit1.jpg 출처 위키백과


이후 다른 어떤 빈 공간을 촬영했을 때도 결과는 같았다. 우주의 어느 방향이든 텅 빈 어둠 너머에는 무수한 은하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인류는 비로소 밤하늘의 장막 뒤에 숨은 우주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천자문, 우주를 읽는 옛사람들의 눈


허블 딥 필드가 드러낸 우주의 풍경은 놀랍게도, 과거 동아시아의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던 첫 번째 서사시, 천자문 (千字文)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6세기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반도로 건너온 천자문은 단순히 1,000개의 글자를 나열한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우주의 질서를 이야기해 주는 첫 번째 과학책이자 인문학 교과서였다.


조선시대 서당의 학동들이 가장 먼저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하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외웠던 천자문의 첫 구절은 마치 한 편의 창세기와 같다.


天地玄黃 宇宙洪荒 (천지현황 우주홍황)

日月盈昃 辰宿列張 (일월영측 진수열장)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치네.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들은 넓게 펼쳐져 있네.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 옛사람들은 밤하늘을 보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하고 신비로운 검은색(玄)을 보았다.


허블 망원경이 겨누었던 바로 그 칠흑 같은 하늘이었다. 그 검고 고요한 하늘은 인류가 수천 년간 이해해 온 우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바로 ‘우주홍황(宇宙洪荒)’이다.


끝없는 시공간(宇宙)이 원시적이고 거친 상태(洪荒)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는 이 통찰은, 단순히 텅 빈 어둠이 아닌, 무언가로 가득 찬 태초의 풍경을 노래한다.


1995년, 인류의 가장 발전된 눈은 바로 그 ‘천현(天玄)’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대의 선현들이 직관했던 ‘우주홍황(宇宙洪荒)’의 실체를 목격했다.


허블 딥 필드는 수천 개의 은하들이 아득한 시공간 속에서 바글거리는, 그야말로 넓고 거친 태초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였다.


사진 속 가장 희미한 은하의 빛은 130억 년을 달려온 빛이다. 우주가 갓 태어났을 무렵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타임머신이었다.


천자문이 혼돈(洪荒) 다음에 질서(日月盈昃 辰宿列張)를 이야기했듯, 허블 딥 필드 역시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증명했다.


먼저, 은하 진화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멀리 있는 은하, 즉 수십억 년 전의 어린 은하들은 가까운 곳의 성숙한 은하들과 모양과 색이 달랐다. 은하들이 서로 충돌하며 진화하는 역동적인 곳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주의 균일성을 증명했다. 어느 방향의 빈 하늘을 찍어도 비슷한 수의 은하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우주가 거대한 규모에서 볼 때 특정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전체적으로 균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우주의 나이를 측정하는 열쇠를 제공했다. 먼 은하들의 거리와 이동 속도 데이터를 통해 우주의 팽창 속도를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었고, 마침내 우주의 나이가 약 138억 년이라는 사실을 높은 신뢰도로 측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허블 딥 필드는 ‘멀리 본다’는 행위가 단순한 물리적 행위를 넘어,


시간의 과거를 보고 현상의 이면을 꿰뚫는 지혜의 여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세 가지 차원의 시선: 육안, 천문, 그리고 혜안


첫 번째 시선, 육안: 생존과 한계의 눈


인간에게 ‘멀리 보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생존 기능이다.


드넓은 평원에서 포식자를 경계하고, 수평선 너머의 기후를 예측하며, 높은 곳에서 길을 찾는 능력은 생존과 직결되었다.


인간의 눈은 수백 광년 떨어진 별빛도 감지할 수 있고, 약 250만 광년 거리의 안드로메다은하를 희미한 얼룩처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육안의 시선은 명백한 한계에 갇혀 있다.


지구가 둥그렇게 휘어진(곡률) 것과 대기의 산란과 미세먼지 등의 방해 때문에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거리는 제한된다.


예컨대, 들판이나 바다에서 키 170cm 인 사람이 볼 수 있는 거리는 약 4.6km라고 한다. 즉, 지평선과 수평선까지의 거리이다.


조건이 완벽하게 맑고 깨끗한 날, 백두산(높이 약 2,750m) 정상에 서면 육안으로 약 180km 떨어진 곳까지 볼 수 있다.


더 근본적인 한계는 우리 눈이 ‘가시광선’이라는 극히 좁은 파장대의 빛만 감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주가 연주하는 거대한 전자기파의 오케스트라에서 우리는 단지 몇 개의 악기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등 우주의 진정한 모습을 들려주는 수많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시선, 천문학: 시간을 보는 눈


육안의 한계를 넘어선 첫 번째 도약은 망원경으로 상징되는 천문학적 시선이다.


이 시선은 물리적 거리를 넘어 ‘시간’을 탐험하게 한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기에, 멀리 떨어진 천체를 볼수록 우리는 더 오래된 과거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를 ‘룩백 타임(Look-back time)’이라 부른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약 8분 12초 전의 모습이다. 밤하늘의 북극성은 조선 세종대왕 시절인 약 430년 전에 출발한 빛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은하의 모습은 현생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 훨씬 전인 250만 년 전의 과거의 모습이며, 만약 지금 당장 안드로메다은하가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250만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될 된다.


허블 딥 필드는 이 천문학적 시선의 정점이다. 그 사진 속 3,000개의 은하는 각각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우주의 화석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수십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동시에 목격하며, 우주가 어떻게 태어나고 진화해 왔는지 그 장엄한 역사를 직접 읽어낸다.


이처럼 과거의 빛과 마주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좁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거대한 우주적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가 존재함을 깨닫는다.


세 번째 시선, 혜안(慧眼): 본질을 꿰뚫는 마음의 눈


가장 심오한 차원의 ‘멀리 보기’는 망원경 너머, 우리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물리적 관측을 넘어 현상의 이면을 꿰뚫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다.


혜안은 데이터와 패턴 속에서 미래를 읽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복잡한 관계 속에서 본질을 파악하는 인간 지성의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이다.


기후 과학자들이 수십 년간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예측은 과학적 혜안 대표적인 사례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는 눈앞의 참혹함 너머에 독립된 조국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민족적 혜안을 가졌다.


김구 선생은 '아름다운 문화 강국'을 꿈꾸었고,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 국가' 건국의 핵심 이념을 제시했다.


18세기 애덤 스미스가 개인의 이기심이 모여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통찰한 것은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본 혜안의 결과다.


2000년대 후반, 모두가 PC 기반 웹 서비스에 집중할 때 스마트폰이 가져올 모바일 시대를 멀리 내다보고 카카오톡을 탄생시킨 김범수 창업자의 통찰은 기술의 잠재력과 인간의 소통 방식 변화를 꿰뚫어 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혜안은 거창한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 당장의 즐거움보다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자기 계발에 투자하는 것, 상대방의 까칠한 말 뒤에 숨겨진 상처를 이해하려는 공감 능력 역시 표면 너머의 본질을 보려는 관계의 혜안이다.



호기심이 혜안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이 지혜의 눈, 혜안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허블의 딥 필드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호기심의 눈으로 들여다본 곳에서 뜻 밖에 우주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지혜를 얻은 것이다.


혜안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꾸준히 노력하며 쌓아가는 ‘지혜의 근육’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급하게 정답을 찾기보다, 호기심을 가지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기를 때, 우리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넓어질 수 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선순환의 반복이다.(존 듀이, John Dewey의 '경험적 학습' 등 참조)


호기심으로 세상을 본다 (Seeing) →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안다 (Knowing) → 그 앎은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더 예리하게 만든다 (Better Seeing) → 더 깊어진 관찰은 더 깊은 통찰과 앎을 가져다준다 (Deeper Knowing)


결국, 혜안은 ‘보는 눈(見)’과 ‘아는 마음(知)’을 함께 단련하는 과정에서 쌓인다고 본다.


허블 망원경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은하와 우주의 광대함을 보았듯,


우리 역시 일상의 무심한 풍경 너머에서 삶의 깊이와 본질을 발견하는 ‘멀리 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혜안은, 호기심의 창을 통해서 마음의 딥 필드를 보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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