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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악기를 끊지 못하는 이유

음악은 영혼의 고통을 치료해 준다!

by 노이 장승진



istockphoto-1089890480-2048x2048.jpg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kr/%EB%B2%A1%ED%84%B0/%EC%96%B4%EB%A6%B0%EC%9D%B4-%EC%9D%8C%EC%95%85%


어린 시절 나는 즐거운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유일한 기쁨은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혼자서 부르는 것이었다. 그 뒤에 사춘기가 되자 노래 부르는 것은 줄어들고 대신에 카세트테이프를 수집해서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좀 더 다양한 취미를 갖고 싶었지만 집이 워낙 가난해 돈을 주고 악기를 배운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악기레슨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겼다. 어렸을 때 왼손바닥에 화상의 상처가 있기 때문에 내 인생에 있어서 악기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서 조금씩 해금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어느새 10년이 넘었고 그 사이 여의도에서 버스킹을 5년 정도 했다. 그다음에는 우쿠렐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기타를 시작했지만 손이 작은 나는 간편한 우쿠렐레가 좋아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음악선생님은 우쿠렐레와 함께 카혼을 가르쳐 주었다. 그 와중에 나는 피아노 연주를 우연히 듣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는 바이올린의 매력에 빠져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퇴직하여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은 내가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들어가는 데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악기에 집착하는 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세 가지 트라우마에 대한 극복, 삶의 활력소, 봉사활동 등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지난날의 상처로 인해 작고 크건 간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열등감이 남보다 심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랐지만 초등학생이 되자 연로하신 부모님은 더 이상 나를 지지할 여력이 없어지자 나의 열등감도 점점 더 커졌다. 게다가 연로하신 어머니가 당뇨병으로 병석에 누워 버리셨고, 더 이상 나를 조금도 케어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내가 태어난 곳은 흑석동의 유명한 유흥가였다. 우리 집의 양옆의 집은 한쪽은 술집이었고 한집은 여인숙이었다. 동네는 호객행위로 언제나 시끄러웠고 파출소 순경들이 자주 왔다. 바로 왼쪽의 친구네 집은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친구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네 집은 주로 남성 손님을 접대하는 종업원인 누나들이 2명이 있었는데, 날씬하고 얼굴도 이뻐서 나는 어렸을 때 그 친구가 부러웠다. 오른쪽 집은 나보다 1살 적은 동네후배네 집이었다. 음식점과 여인숙을 하고 있는 동네에서는 부자축에 속하는 집이었다. 양쪽집보다 우리 집이 더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기가 죽었던 것 같다.


우리 동네는 주로 과거 대폿집이라고 하는 술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중간중간에 여인숙이라는 여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네입구에는 청소년출입금지구역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우리 동네는 항상 싸움으로 시끄러웠고, 흔히 말하는 깡패도 많고 패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한 번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도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경찰관들이 대규모로 우리 동네에 출동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종업원들을 무섭게 잡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 있었던 윤락행위방지법이라는 적용 하여 지금의 서울여성플라자 자리에 있었던 부녀보호소에 강제적으로 입소시켰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태어난 환경은 평범한 주택가가 아니라 유흥가라는 것을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동네에서 통장일을 보던 아버지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절대로 금지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도 별로 없고 알게 된 친구는 좀 더 멀리 떨어진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교회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중앙대학교 학장의 자식, 의사자식, 사업가의 자식들이어서 정말로 그야말로 노는 물이 달랐다. 그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입는 옷이 다르고, 용돈이 풍부하였지만, 나는 달랐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바지를 몇 개월씩 그대로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우리 동네를 지나던 교회 여동생을 우연히 만났던 나는 당시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교회를 같이 다니던 나의 형도 내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고 나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많은 열등감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는 열심히 살았으나, 지금도 가난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트라우마가 되어 있다.


둘째, 악기는 우리의 삶에 활력을 준다. 나는 남보다 열심히 살기 위하여 일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일과 공부로 지칠 때 가장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술 마시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바로 악기였다. 퇴직하고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도 악기레슨을 끊지 못하고 있다. 물론 독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 경험으로는 독학으로는 실력이 늘지 않고 퇴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악기는 언제나 내가 손내밀 때 잡을 수 있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악기 연주를 할 때면 어느새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 연습을 하면서 언젠가 대가가 되어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꿈을 꾸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행복하다. 하지만 이 꿈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기도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 모두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미국의 90세의 홈리스부부의 연주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각박하더라도 우리의 사랑과 음악은 우리의 인생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나도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듯 연주를 하고 편안함을 주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아래 유튜브를 꼭 한번 봐주시기를 바란다.

https://fb.watch/xNv3 mQWDL9/


셋째, 악기를 통하여 남에게 기쁨을 주는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경로당을 방문하여 해금이나 우쿠렐레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하기도 한다. 특히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많은 요양원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분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동안 다녔던 봉사활동 횟수가 1,000번에 이르는 것 같다. 그 많은 음악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에피소드가 많은 것 같다. 어떤 경우가 전신마비가 되어 있는 와상환자로 누워서 박수를 치시는 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보람도 느끼고, 어떤 경우 요양원 어르신이 연주를 듣다가 휠체어 밑으로 빠져버리신 해프닝도 있었고, 복지시설 종사자의 귀찮아하는 듯한 불친절한 태도에 접하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젠 나를 비롯한 주위사람들은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진입하고 있다. 언제까지 나의 음악 배우기에 대한 열정이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악기를 연주하다가 죽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악기를 연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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